포스트 코로나 시대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직장에 출근하는 아내가 차려주는 간단한 샐러드와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유튜브 실시간 뉴스를 보면서 아침을 시작한다.
출근 시간 30분 전에 나의 작은방 홈오피스에 들어가서 컴퓨터로 미리 출석 체크를 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철봉 운동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일을 시작한다. 메일을 확인하고 업무적으로 관련된 담당자들과 전화 회의를 한다.
하루 종일 조그만 방에 처박혀 일만 할 수 없으므로 거실로 나와 집안 여기저기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기도 한다. 주방에 가서 싱크대 설거지 감을 확인하고 베란다로 향해서 빨래들이 잘 널려져 있는지 이미 말랐는지 점검하고, 바닥에 떨어진 아이들 장난감들과 옷가지를 주워서 제자리에 넣는다.
직장에서도 일을 하다 1시간에 10분 정도는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이렇게 작은 방에서 일을 하다 쾌쾌한 방에서 나와 맑은 공기 좀 쐐일겸 거실로 나오곤 한다.
그런데 재택근무를 하면서 요즘에 짜증이 나는 일이 생겼고 이것으로 인해 아내와도 3일간 침묵 전쟁을 벌인적이 있다.
택배가 왜 그렇게 많이 오는 건지 모르겠다. 하루에 평균 2번 정도 택배기사의 초인종이 울리고 택배 박스를 들여놓고 정리도 해야 한다. 아내는 평소에 외모를 잘 꾸미는 것과는 다르게 집안, 물건 정리는 신경을 안 쓰기 때문에 집안 정돈의 몫은 오로지 나에게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알고 지내는 존경스러운 여자 주부 분들이 대부분 내 아내와 비슷한 성향이다.)
택배가 오면 아내는 포장을 뜯긴 하지만 뜯은 포장 박스나 쓰레기는 그냥 그 자라에 놓고 치우질 않는다. 택배뿐만 아니라 퇴근하고 집에 오면 가방이나 옷, 양말, 속옷도 벗어 놓고 그 자리에 내 팽개 치고 빨래 통에 넣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식사를 하고 나서 테이블에 남은 찌꺼기들을 정리하지 않고 건조기에 들어 있던 옷들도 내가 손대지 않으면 건조기에 그대로 며칠이고 방치가 된다.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아내의 치명적인 결함들이 스트레스로 쌓이기 시작했다. 과거에 아버지 학교에서 배웠던 대로 힘든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상황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을 항상 염두해 두고 살아왔건만 그래서 정신적으로 세뇌시키며 내가 지속적으로 치우긴 했지만 한도 끝이 없는 게 치우는 일이다 보니 평생을 이러고 살아야 할 거 같아서 여기서 선을 긋고 타협점을 찾고자 나도 아내에게 폭발하고 만 것이다.
더구나 아이들도 항상 뭔가를 정돈하지 않고 아무 데나 흐트러뜨리고 오로지 집에서 정돈의 몫은 나에게만 있었다. 아무리 내가 재택근무를 한다고 해도 집안일을 하기 위해서 재택근무를 하는 것은 아닌데 모든 가족들이 나의 재택근무는 회사일과 함께 집안 일도 병행해야 된다 혹은 집안일도 병행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암묵적인 동의를 한 것 같았다.
"여보 오늘 재택 근무지, 빨래 널어놓고, 화장실 청소 좀 해"
"있다 냉동식품 택배 올 거 있으니까, 택배 오면 냉장고에 들여놔"
"아빠 오늘 재택근무니까, 나 있다 학교로 데리러 와"
"오늘은 태권도 안 가고 싶으니까, 아빠가 내 대신에 태권도 학원에 전화해서 안 간다고 말해줘"
"아빠 오늘 재택 근무지? 나 어린이 집에 오래 있기 싫으니까 점심 먹고 데리러 와"
재택근무를 핑계 삼아 추가적인 집안일이 부과되었고,
집안일이 힘들고 고된 일은 아니지만 억울하게 나만 말뚝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지속이 된다면 내가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습관이 잘못되어 갈 것 같았다.
아내가 퇴근하고 아이들이 모여 있는 저녁 식사 테이블 앞에서 매일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쓰레기 좀 주워, 옷 가지도 제 자리에 넣고!"
"저 택배 내가 뜯어보니까, 똑같은 거 집에 있는데 왜 또 택배로 주문했어?"
"네 책이 왜 저기에 있어, 책꽂이에 꽂아놔!"
"수건은 왜 쓰고 안 걸어놔!"
"태권도 복은 벗어 넣고 왜 소파에 놓냐, 옷걸이에 걸어놔!"
"밥 먹을 때 흘리지 좀 말고, 흘린 건 너네들이 다 주워!"
"마스크는 왜 방바닥에 넣는데, 마스크 걸이에 걸어놔!"
"너 다음 날 학교 갈 준비물 챙겼어, 지금 바로 챙겨놔, 내일 아침에 챙기느라 지각하지 말고!"
등등등
아이들이 집에 오고 아내가 퇴근하면 똑같은 내용의 잔소리를 5번 이상 쏘아대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잔소리를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마치 내가 집안일에 신경을 쓰는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아내는 웃으면서 한 마디를 했다.
"여보 당신 재택근무하면서 요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거 같애."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부쩍 집안 여기저기가 눈에 띄고 뭔가 정리를 하고 싶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워졌기 때문이다.
잔소리는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터라,
내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이
어쩌면 재택근무 후에 집안을 바라볼 시간이 많이 생기면서
여성으로 점점 진화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안 해서 첨만 다행이기도 하다.
만약 공부하라는 잔소리까지 하게 된다면 나는 정말 잔소리의 도를 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