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귀함을 알아간다.
우리는 아주 작은 행성에 살고 있습니다.
*3 (2018.5.18.)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이름을 붙였다.
소행성 1호는 그런 곳이다.
주말엔 친구가 놀러 왔다. 그리고 저렴하게 샀던 보온 밥솥이 고장 났다.
내가 가진 것 중 제일 편한 바지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이제부터 배부를 준비 하라고.
하지만 밥은 편의점 즉석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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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엔 느지막이 늦잠을 잤다. 하룻밤 자고 간 방토와 아주 느긋한 시간을 보냈는데. 열한 시 반쯤 깨작깨작 일어나 장을 보러 나갔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오리고기를 한 팩 사와, 모두 굽자고 하니 그녀는
"다 못 먹어 안돼 안돼." 연신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먹는 것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믿는 나는
"벌써 끝났다고 생각해?"라며 결국 한 근을 다 먹고야 말았다.
그 후에도 방토는 커피도 마셔야 했고, 요구르트도 먹어야 했고, 아이스크림도 먹어야 했다. 방토가 간 뒤, 저녁에는 나눌이 왔다. 나눌과는 계란찜을 푸짐하게 끓여 이것저것 반찬들과 곁들여 먹었다. 실은, 올해 함께 하게 될 일들을 의논하러 왔지만 먹는 데에 시간을 다 쏟았다.
화요일에는 일찌감치 나갈 채비를 했다. 근처에 볼 일을 보러 다녀올 참이었다. 현관문을 벌컥 여는데, 문이 활짝 열리지 않아 뭔가 하고 내려다보니,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가 문 앞에 놓여 있다. 앗차, 엄마가 어제 이것저것 보낸다고 하셨지- 테이프를 뜯어 박스를 열어보니, 봉지에 담긴 분홍색 수건들이 올려져 있다. 반찬 냄새 베일까, 봉지에 담았을 테다. 네 개나 담아 보냈다. 거기엔 '00역 풍천장어'나 '00 골프장'이 적혀 있다.
엄마는 언제부턴가, 기념품으로 받은 수건들을 장롱 속 깊숙한 곳에 쟁여두고 사셨다. 비단 수건뿐일까, 선물로 받은 냄비, 프라이팬 세트, 컵 같은 것들은 아무도 모르게 창고 속 어딘가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 그냥 쓰지 그걸 왜 또 챙겨놔!"
"이거 다, 너그들 시집갈 때 줄 거야~"
박스에 있던 모든 것들을 꺼내놓고 보니 봉지마다 정성스레 담긴 멸치볶음, 오이지, 매실장아찌, 김치통 없을까 봐 통째로 보낸 파김치. 꾹꾹 눌러 담은 집된장, 고추장. 물렁해진 아이스팩 위로 차곡차곡 쌓여있다.
이렇게 반찬을 보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주- 엄마 집에 다녀올 적에, 다시 집에 가려고 가방을 들춰 매며,
"근데 엄마- 된장 고추장은 뭘 사야 해?"라는 한 마디에, 엄마는 뒷목을 잡으셨다.
"된장, 고추장 남들 다 퍼줬고만.. 정작 딸내미 먹을 건 안 챙겼네."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신 터- 이렇게 커다란 택배를 보내신 것.
엄마 집에 걸려있던 낡은 수건들이 떠올랐다. 심지어 거기엔, '2002년 00 중학교 체육대회 기념'이라고 적힌 수건도 있었다. 택배 잘 받았다고, 고마움을 전하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무슨 수건까지 보냈어! 엄마 집 수건도 낡았더니만.. 어휴."
"엄마 집은 엄마가 낡아서 괜찮아."
녹은 아이스펙 위로 물기가 흘러내린다.
눈물이 핑- 돈다.
수요일엔 비가 왔다. 와도 와도 너무 많이 왔다. 공기청정기도 없고, 에어컨도 없는 집에 제습기가 있을 리가. 비 오는 내내- 여기가 습식 사우나인지, 수영장인지 헷갈릴 정도의 습기를 집 안에서 느꼈다. 제습기를 사본 적 없는 터라, 무엇을 기준으로 검색해야 하는지- 머리가 아팠다. 살면 살수록 사야 할 것들은 왜 이리 많은 걸까.
걱정 없이 살고 싶다는 건, 걱정 없이 사고 싶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까.
소득과 소비 사이, 내게 남은 세금신고가 떠오른다. 5월은 종합소득세 신고의 달이다. 연말정산을 하지 않은 중도 퇴사자, 이직자, 소득세 신고를 해야 하는 프리랜서, 개인사업자들에게 바쁜 달이다. 물론 대리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신고하는 경우에는 머리가 아픈 달이기도 하다. 작년 가을, 퇴사한 이후- 연말정산을 따로 하지 않은 덕에 작년 근로소득과 기타 소득을 함께 신고하려던 차- 궁금한 것이 있어 국세청 126에 전화를 걸었다. 30분을 대기해도 상담원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럼 까짓 거, 가서 물어보자 싶어 폭우를 뚫고- 세무서를 찾았다.
대강당에 자원봉사자분들이 책상 하나에 두 명씩, 모니터 세 개를 두고 일하고 계셨다. 앉자마자 신분증을 요구했고, 딱히 질문이나 설명 없이 2~3분 만에 나의 소득세 신고가 끝이 났다. 이 간단한 절차로 나는 약간의 돈을 환급받을 예정이다. 없던 돈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지만, 아니다- 냈던 돈을 돌려받는 것뿐이라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제습기 값은 번 셈이다.
목요일은 식탁이 왔다. 안사고 미루고 버티던 것이 드디어 온 것. 28일에 도착 예정이라더니 벌써 와버렸다.
겸조는 연신 "왜 여기에 식탁을 둬야 하는지 이해가 안 돼."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짐과 물건을 늘리지 않고 살겠다, 1톤 트럭 넘어가는 짐을 이고 지고 살지 않겠다는 다짐은 금세 엎어졌다. 이미 우리 집엔 엄청 큰 책장과 책상이 생겼고, 의자가 2개 있다. 냉장고도 크고 세탁기도 크다. 다행히 침대는 사지 않았지만, 식탁은 있어야 했다.
식탁 역시 조립형으로 샀기에, 온갖 도구들을 늘어놓고 겸조와 나란히 앉았다. 식탁 다리에 철판을 대고 십자드라이버로 못을 끼운다. 한데, 구멍이 맞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안될 노릇이었다. 도배, 타일을 거의 직접 하신다는 아래층 아버님께 찾아갔다. 겸조는 조심스레 엄청난 크기의 전동드릴을 빌려왔고, 드르륵 한 방에 식탁 다리들을 조립해버렸다. 겸조가 다리를 만드는 사이, 나는 상판에 철제 부품을 대고 나사를 돌렸다. 다리가 붙을 자리다. 이제 다리를 상판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데, 처음에 잘 들어가지 않았던 못이 문제다. 드릴로 돌렸어도, 잘 맞지 않아, 끝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머리가 툭 튀어 올라온 것. 우리가 가진 것은 천 원짜리 드라이버와 아랫집 전기드릴, 고무망치가 전부인지라- 겸조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 다리를 들고.
아래층 아버님은 허허허 웃으셨다고 한다. "다 그러며 배우는 것" 이라며 커다란 쇠망치를 내어주셨다고 한다. 튀어나온 못 머리를 망치로 여러 번 두드리니, (나무다리에게 좋을 것 같진 않지만) 머리가 쏙 들어갔다. 덕분에 상판과 다리가 흔들릴 일은 없을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식탁을 완성하고, 저녁을 차려 먹었다. 식탁의자는 따로 주문하지 않은 덕에, 책상 의자를 옮기며 왔다 갔다 했지만- 겸조는 연신 "삶의 질!"을 외쳤고, 의자에 앉아서 먹는 생활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기쁨을 주었다.
금요일엔 책상 서랍이 왔다. 삼십 년 자매 생활에서 얻은 인생 최고의 교훈은 자고로 언니 말은 새겨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언니 말은 거의 맞았다. 아니 적어도, 언니 말 들어 나쁠 것 없다는 것이 내 인생 가장 큰 교훈이었다.
아무리 치우고 정리를 해도, 수납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오갈 데 없는 물건들은 모두 책상 위로 가기 일수였다. 덕분에 책상에서 작업을 하려면, 일단 치우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큰 맘먹고 책상 서랍도 사버리자고 결심하며, 야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철제 서랍 같은 건 사지 마, 조립하기 진짜 힘들어."
"원목을 사 원목."라는 답을 주었다.
주특기가 검색인 나는, 온갖 홈페이지를 뒤적였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찾으면 크기가 맞지 않고, 재질을 따지면 가격이 비쌌다. 합리적인 선택을 헤맨 며칠을 보내며- 능력이 된다면 이러저러한 검색 전문 어플을 만들고 싶다는 이상한 결론만 지었다.
결국에는, 그래 결국에는 제일 저렴한 철제 서랍을 고르며 그래 까짓 조립하고 말지- 하며 또 택배를 기다렸다. 그런 금요일엔 철제 서랍이 왔고, 상자를 뜯어 과감하게 혼자 조립을 시도했다. 두 시간에 걸쳐 두 개를 완성한 나는, 세상없는 욕까지 만들어 가며 할 판이었다. 이다지도 힘을 들인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조립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냥 힘이 드는 일이라고 답할 수 있다. 아주아주 사소한 불량들 덕분이다. 반품하기에는 사소하고, 애써 조립하기엔 화가 나는 그런 부분들 말이다. 하-
그래서, 일단 언니 말은 들어야 하는 것이 맞다.
야니 말을 들었어야 했다. 아이고.
조립을 마치자, 겸조가 왔다. 천장에 전선을 빼, 벽지가 뜯어지지 않을 정도의 구멍을 냈다. 식탁 위로 작은 등을 새로 달았다. 본래 달린 천장 등은 어쩐지 파란 감이 도는 백색이었다. 꽃을 두어도 파랗고, 음식을 먹을 때도 파란 감이 돌아, 왠지 모르게 차가운 맛이었다.
그는 "여기에 왜 등을 달아야 해?"라고 물었지만, 정색으로 일관한 덕분에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완성하고 보니, 식탁 위 작은 등은 공간을 따뜻하고 아늑하게 밝혔다. 뭐랄까 보면 볼수록 예쁜 곳이 되었다. 마음에 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만 관계라고 볼 수 없다. 작은 물건과 공간 사이에서도 관계라는 것이 생긴다.
보이지 않는 관계를 매만지고 정성을 들이는 일은 때론 아득하지만, 천천히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사실 이번 주는 내내 아프고 피곤한- 거의 모든 면역력이 바닥을 쳐, 몸이 내게 보낼 수 있는 모든 신호들을 사용해 "너 그러면 안 돼" 하고 발악하는 것 같았다. 먹고사는 잘잘한 시간을 보내야지, 다음 주엔 꼭 운동하러 가야지, 게으른 결정을 번복하고 반복하는 일상을 보낸다.
소행성에서의 하루는 매번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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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토와 나눌, 야니는 친구들의 별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