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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수난 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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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던컨 Jan 11. 2022

냉장고는 분홍색 비스포크여야 합니다.

"마감이 잘 됐네요"


불타버린 집은 인테리어 업체를 선정하고 나서부터 하루가 다르게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화재 잔해물을 철거하고 화재 냄새를 빼는 작업을 한 다음부터는 재건축에 버금가는 리모델링 작업이었다.

바닥에 물이 고였을 수 있으니 방수 작업도 했고 난방 코일도 다시 깔고 샷시도 모두 새로 들여놓은 후 인테리어 업체와 집을 둘러보고 있던 중이었다.


두 달여간 원룸 생활에 가족들이 지쳐갈 무렵

완성된 집이기도 했지만 설날 전에는 다시 일상을 회복하고 싶어서 집수리 현황을 매일매일

체크하고 있었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같은 동 주민들은 불난 집이 어떻게 바뀌었나 흘긋흘긋 보며 드나들고 있었다.

불났을 때는 마음이 만신창이라 그런 시선이 동물원 철창 안 동물을 바라보는 것 같아

불편했었는데 수리된 집 안으로 떨어지는 시선이

기분 나쁘지 않은 점은 아마 오뚝이 같이 다시 일어섰다고 보여주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인테리어가 완성되어가면서 가전제품도 고르게 되었다.

당연히 신제품으로 고르기도 했지만 색상도 시커멓게 재로 변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인지 아니면 에스트로겐 폭발로 호르몬 불균형 때문인지 무튼 분홍색을 고집하게 되었다.


그래서 벽지도 분홍색, 냉장고도 분홍색, 전등갓도 분홍색 온통 분홍색으로 골랐다.

새 물건 들여놓는 데는 내 의견을 존중하는 집사람이라 화재로 물건 버릴 때처럼 부부 의견 대립은 없었다.  

 

하루는 동료들이 비상연락망을 업데이트한다며 집주소를 확인한다길래 무심코 집주소를 기재하고 난 며칠 후 주말 아침 집으로 택배가 왔다.

새 집에는 재즈음악이 흐르는 게 어울리겠다며 동료들이 고심해서 고른 블루투스 스피커였다.



Aesop 디퓨저, 몬스테라 화분 등 여러 선물 후보를 놓고 다들 의견이 분분하다가 결국 스피커로 정해졌다는 후기도 들을 수 있었는데

내 옷에서 탄 냄새난다고 놀렸던 동료들에게 눈을 흘긴 적이 있었던 게 미안해지며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느꼈던 주말 아침이었다.


같은 집이지만 모든 게 새로 바뀐 집에서 우리 가족은 일상을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9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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