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수천번도 넘게 뒤통수가 쥐어박혀 자존감이란 게 남아 있을 리 없는 나는 마우스다.
내 바닥 치는 자존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모르겠다.
마우스라는 우스운 이름으로 나를 얕보는 건지 아니면 매일 머리를 쥐어박히는 탓에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웅크리고 있는 내 모양이 만만해서 그런 건지
암튼 나를 깔보고 함부로 대하고 있어 내 자존감은 제로이다.
마음은 그런 상태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닌다.
워드, 파워포인트, 엑셀이라는 여러 운동장에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데
워드, 파워포인트는 그나마 가끔 쉴 기회라도 있지만 엑셀이라는 운동장에 들어서면
단거리, 장거리 가리지 않고 질주해야 한다.
손가락이란 놈은 내 뒤통수만 때려대면 운동장 어디든 다 가는 줄 알지만
세로 맨 아래 1048576 행까지 뛰어 내려갔다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끝없는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 보면 아 정말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다.
내 목덜미에는 동그란 바퀴가 있어 손가락이란 놈은 때론 바퀴를 이용하기로 하는데
살살 돌릴 때면 나는 시속 6킬로미터로 빠른 걸음을 걷지만 갑자기 마구마구 돌려대면
시속 12킬로미터로 전력질주를 해야 한다.
그렇게 위로 아래로 천천히 걷다가 다시 심장 터질듯한 뜀박질을 번갈아 하고 나면
허덕허덕 진이 빠지고 맥이 풀려 주저앉고 만다.
그렇게 나를 가지고 노는 손가락이 밉지만 사실 진짜 못되고 무서운 놈은 손바닥이다.
손바닥이란 놈은 은근슬쩍 두툼한 살집으로 나를 끌어안고 비벼대는데 불쾌하기가 말도 못 한다.
여름이면 체온이란 게 이렇게 뜨거울 수 있나 싶을 정도라서 화상을 입는 게 아닌가 싶고
겨울이면 얼음장같이 차가워서 안 그래도 웅크린 나를 더 움츠리게 만든다.
불쾌한 것도 불쾌한 거지만 날 움켜쥐고 내려칠 때면 자존감 문제가 아닌 자괴감에 괴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손가락이 뒤통수를 쿡쿡 눌러 화가 나지만 가리키는 데로 가서 화를 꾹 참고 ‘똑똑’ 노크하지만 컴퓨터란 애는 늘 굼뜨고 둔해서 바로 알아듣지 못한다.
그럼 다시 두 번 세 번 정중하게 노크하지만 여전히 컴퓨터란 애는 묵묵부답이고 그럴 때면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이란 놈이 나한테 화풀이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탕탕' 하고 두 번 나를 바닥에 내리치고 다시 뒤통수를 찍어 누르는데 그때부터는
쥐어박는 게 한두 번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딸깍 딸깍 딸깍 딸깍 딸깍 딸깍’ 숨 쉴 새도 없이 쥐어박힌다.
“아! 좀 그만 좀 하라고!” 하지만 손가락은 손바닥과 일체가 되어 들은 체 만 체 계속 쥐어박는다.
그러기를 두어 번 반복하고 나서도 컴퓨터가 대답하지 않으면 손바닥은 부아가 치밀었는지
나를 움켜쥐고 “에이 씨 x” 하면서 책상 위로 나를 메다꽂는다.
날 귀히 여겨 갖다 놓은 마우스 패드인지 모르겠지만 그럴 때면 레슬링 매트가 된다.
손바닥은 정의의 프로 레슬러 타이거 마스크이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반칙왕 레슬러 인양 단죄를 받는다.
박치기, 드롭킥은 예사며 헤드 시저스 같은 고난도 기술을 구사하다가 마지막 압권은 더블 엑스 핸들이라고 도끼질하듯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기술인데 그렇게 맞고 나면 맞는데 이골이 난 나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일방적인 구타 후 나를 잡아 패던 손가락과 손바닥은 더 방법이 없는 걸 알고 컴퓨터 배꼽을 꾸욱 눌러 리셋을 한다. 그 사이 나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두툼한 손바닥 놈은 늘 이렇게 뒤어서 나를 끌어안고 못살게 군다. 꽃이 그려진 마우스 패드이지만 얻어맞는 레슬링 매트이고 구타의 산 현장이다. 내 일상은 이런 화풀이 대상이 되어 쥐어박히고 내던져지는 구타의 반복인데 다행히 여섯 시부터
다음날 아홉 시까지는 고요하다.
그럴 때면 옆 책상 앞 책상 마우스와 ‘오늘 몇 대나 맞았니?’ ‘아까 드롭킥 맞고 나서 괜찮니?’
하며 안부를 묻는다.
그 와중에 몇몇 재수 없는 애들은 야근이라며 쉬는 시간 없이 맞아가며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뛰어다니고 있는데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맞지만 말고 도망가지 그러냐 말하는 애들도 있지만 도망가지 못하게 목에다가
줄을 걸고는 그 끝을 책상 밑 어딘지로 모르는 곳에다가 묶어버려서 도망갈 엄두도 못 내고
있는 나 마우스다.
곧 여섯 시라서 손바닥은 나를 안고 손가락은 나를 찍어 엑셀, 파워포인트, 워드 운동장을
정리하고 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닌 곳이라 어디에 뭐가 있고 뭘 고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눈에 보이는데
손가락은 저장도 안 하고 종료를 하고 있다.
이럴 거였으면 왜 쥐어박히고 처맞아가면서 그 고생을 했는지 억울해서 엎드린 채 고개를 돌려 째려보지만 그런 내 항의가 전해질 리가 없는지라 손가락은 화면 왼쪽 구석 ‘시스템 종료’를 누르고
손바닥은 귀찮다는 듯이 나를 휙 밀쳐버리고 수고했다는 말도 없이 일어선다.
그렇게 구타는 멈춘다.
하룻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