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 맛집이 있다며 회사 선배를 따라간 식당에서 수제비의 또 다른 이름이 털레기란 걸 메뉴판을 보고 알았다.
털레기의 어원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온갖 재료를 한데 모아 털어 넣어 만들었다는 설과
싹싹 털어 먹어치운다는 설에서 털레기란 생소한 이름의 탄생 배경을 찾을 수 있었다.
주문한 털레기 2인분은 족히 4인분 양이라 할 만큼 엄청난 크기의 뚝배기에 담겨 나왔는데
쫄깃한 수제비도 맛있었고 말린 새우로 육수를 낸 뜨끈 시원한 된장국물에 연거푸 수저질을 하게 된다.
맛있는 음식인데 반해 털레기란 이름은 너무 성의 없게 지은 것 같아 괜히 미안했던 음식이었다.
그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지금 내 나이였을 때였다.
삼십 대의 나였고 사십 대의 그였는데 어느새 둘은 사십 대와 오십 대가 되어버렸다.
선배는 회사에서 나름 잘 나가는 트랙을 밟고 있어서 팀장 이후에 임원이 될 줄 알았는데
팀장 자리 내려놓은 뒤 속세 욕심이 없으니 세상 근심도 없다며 훠이 훠이 지내는 모습에
아직 바빠 죽겠는 나는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걸어가는 동안 근황 토크를 시작했는데
선배는 얼마 전부터 드라마 작가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며 흥미로운 이야기 소재를 꺼내기 시작했다.
작년 연말인가 선배는 드라마 작가로 제2의 인생을 꿈꾼다면서 학원 입학시험을 본다고 했었는데
그새 한 번 낙방이 있었고 재시험 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 간다며 강사와 커리큘럼 그리고 학생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배움이란 늘 흥미롭기도 하고 재미있게 봤던 '멜로가 체질' 이란 드라마 주인공 역시 드라마 작가였던지라 선배의 학원 얘기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계속 주거니 받거니 계속되었다.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60분 내에 기승전결이 나타나는 단편 드라마 대본을 써서
각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극본 공모전에 당선이 되면 작가가 된다고 하는데
주로 미니 시리즈만 봐왔던지라 사랑, 배신, 연민, 후회 등 보편적인 진리로 한 시간 내에
기승전결이 뚜렷하게 보이는 극본 구상의 어려움을 선배와 대화를 하면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대화하면서 회사에서의 이런 일상을 드라마로 담아보세요 하면서 마치 내가 드라마
보조작가라도 된 양 한 두 마디 떠들 수 있어서 신선했다.
오십이 넘은 평사원이라면 대개 나를 이렇게 부려먹고 버린 회사에 대한 앙갚음으로
정년까지 남은 시간을 얼마나 일 안 하고 따박따박 월급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본인이 체득한 비법을 알려주면서 '적당히 해 그래 봤자 다 똑같아'라는 패배주의 가득한
훈수를 두고 남은 인생을 위한 방편으로 부동산, 주식 등에 대한 호구지책을 열거하기 마련인데
선배는 드라마 작가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열정적으로 사는 것 같아 남달라 보였다.
털레기 마냥 인생의 온갖 재료를 탈탈 털어 넣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 작가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선배이길 기원한다.
feat. 서소문 롯데캐슬 봉이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