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삼실 우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던컨 May 27. 2022

삼실 우화 일곱 - 볼 하얀 사춘기

곱디 고운 내 뺨

진주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내 뺨을

하루에 열 번도 넘게 그 더러운 데다 야한다.


출퇴근 버스 타고 내릴 때

커피 마신다며 카페에 갈 때

점심 저녁 식사하러 갈 때

아프다며 병원, 약국 갈 때

급하다 택시 잡아타고 내릴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는지도 모르는 그곳이 역하고 싫어 피하려 하지만 우악스러운 손으로 내 뺨을 무지막지하게 밀어 넣은 뒤 결제 문자를 받고 나서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나는 신용카드이다.


아침저녁 출퇴근 버스를 타기 전 꼭 나를 지갑에서 꺼내 맨 살의 뺨을 버스 카드 리더기에 비비도록 다.

가끔 지갑 속에 콕 파묻혀 있을 때 버스 리더기는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다시 대주세요!'라는 말을 하곤 해서 굳이 꺼내 들이대나 보다.


버스 카드 리더기는 대개 시커먼 색깔에 퉁퉁하고 뭉툭한 녀석인데 소리는 겉모습 다르게 상냥한 여자 목소리이다.

탈 때는 '승차입니다.' '환승입니다.' 이러고 내릴 때는 '감사합니다.' 이러는데 가끔 뺨을 두 번이라고 대면 '이미 처리가 되었습니다.'라는

외모와 전혀 다른 상냥한 목소리가 가증스럽다. 


어떤 카드들이 볼을 비벼댔을지 모를 버스 리더기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다행이다.

카페에 가면 무인 계산대가 나를 기다린다.

우악스러운 손의 짤막한 손가락은 화면을 꾹꾹 눌러가며 커피를 고른 다음  '결제' 버튼을 누른 뒤 나를 좁고 답답한 틈으로 밀어 넣는다.


암흑 같은 삽입형 리더기 안 인식 센서는 다짜고짜 내 볼 뽀뽀를 해대곤 만족했는지 제 맘대로 결제가 완료되었다며 신호를 보낸다.

그렇게 센서의 침을 묻힌 채 다시 광명을 맛보면 참던 숨을 훅 하고 몰아쉬며  역겨운 시간을 잊으려 한다.


요새는 무인 계산대가 늘어나서 이렇게 원치 않는 볼 뽀뽀를 할 때가 많은데  더 최악은 일반 리더기이다.

일반 리더기는 허름한 밥집, 술집 같은 침침하고 컴컴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데 내가 가게 주인의 손에 넘어가서 불쾌한 건 둘째고 일반 리더기를 통과하며 온 뺨에 센서의 침을 묻혀야만 결제 완료 소식을 들을 수 있는데 때론 인식이 잘 안 되었다며 이렇게 저렇게 두 번 세 번 리더기에 비벼대고 오면

뺨은 물론이고 온 몸이 침 범벅이 되어 역겨움의 극치를 맛보곤 한다.  


오늘 저녁은 우악스러운 손에 짤막한 손가락을 가진 이 인간이 거래처와 약속이 있나 보다.

석식이라 하면서 테이블에 술병은 이미 열 병이 넘었고 모인 사람들 모두 거나해졌다.

시간이 열 시가 넘어 자리를 파하려 하는데 테이블에서 카운터까지 열 걸음 걸어가는 동안  서로 자기가 계산하겠다며 계산서를 뺏고 뺏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다가

카운터 앞에서는 상대방의 신용카드를 막고 자기 신용카드를 내미는 쿵푸 액션 영화를 찍고 있다.    


"에헤이 차장님! 잠시만요 잠시만요!" 하면서 상대방 팔 목을 틀어쥐더니

"사장님! 이걸로 결제해주세요!" 하면서 볼 하얀 나를 카운터를 향해 휙 하고 던지는데 날아가지 못하고 카운터 모서리에 맞아 바닥에 툭 떨어진 나를 상대방은 구둣발로 쿡 밟은 뒤

"아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조건 저희가 계산합니다." 하면서 자기 신용카드를 내민다.  


하루 종일 리더기 침 만신창이가 된 내 뺨에

방금 전 화장실 다녀왔는지 찌린내 축축한 구둣발 물기가 몸서리치게 만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삼실 우화 여섯 - 몽블랑 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