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깎아준 사과와 머슴밥

그 시절의 우리의 운명

by 마음혁명가

*너는 내 운명


사랑 고백을 받은 지 불과 15일 만에 시작된 본격적인 데이트.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우리의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우리는 늘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1999년의 마지막 밤, 새해를 앞두고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던 종로 거리.

나는 종로3가 즈음에서 홀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고, 남자친구는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종각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고 했다.

서울 하늘 아래 이동거리도 늘 겹쳤다. 내가 관악구에서 셋째 언니와 자취하며

양천구와 강서구를 오가며 근무할 때, 그 사람 역시 같은 동네를 누비며 일하고 있었다.

언니의 결혼으로 중구로 거처를 옮겼을 때도 그는 여전히 중구 인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서로의 발자취를 맞춰보니 우리는 늘 5~7km라는 가까운 반경 안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었던 셈이다.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소름 돋는 신기함에 "분명 길에서 한 번쯤은 스쳤을 거야"라며 웃음꽃을 피웠다.

하지만 진짜 인연의 시작은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 가을, 중학생이었던 나는 남자친구가

던 동네에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한참을 놀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차를 기다려야 했던 내게 친구가 제안했다.


“차 시간 남았는데 과수원 하는 친구 집에 가서 사과나 먹고 갈래?”


친구를 따라 들어간 곳은 도로변 과수원 안에 위치한 아담한 집이었다.

그곳이 바로 남자 친구의 집이었다. 그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그가 직접 깎아준 사과를 나누어 먹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놀랍게도 그는 그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너 사과 깎아 줬잖아.”

“친구들 오면 원래 다 깎아 주는 거 아냐?”

“아니, 나 여자한테 사과 깎아 준 건 네가 처음이었어.”


인기 많던 그였기에 거짓말 말라며 장난스레 대꾸했지만, 그는 진지했다.

다른 친구들은 친해서 알아서 깎아 먹게 내버려 두지만, 내게만은 직접 깎아 주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께서도 "그때 와서 사과 먹고 간 학생"이라며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중학교 시절의 찰나 같던 만남이 수십 년을 돌아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운명이라는 단어 외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첫 인사를 드린 나의 생일날


차도 돈도 없던 시절, 우리의 데이트는 늘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한 뚜벅이 여행이었다.

가끔은 멋진 차를 타고 바다로 떠나는 커플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대중교통 데이트가 우리에게 더 많은 대화와 소소한 재미를 선물해 주었다.

익숙한 풍경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매번 새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생각에 삼각대와 카메라는 우리의 필수품이었다.

멋진 풍경만 마주하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삼각대를 세웠다.

오래 걷느라 다리가 지치고 고단할 때도 카메라 렌즈 앞에만 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우리만의 추억 앨범은 한 장 한 장 두툼하게 쌓여갔다.

2001년 3월 11일, 내 생일을 맞아 특별한 외출을 계획했다.

남자친구는 형의 차를 빌려 왔고, 우리는 처음으로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용인의 놀이동산으로 향했다.

놀이 기구를 타는 재미보다 예쁜 풍경 속에서 서로의 모습을 담는 것이 더 즐거웠던 날.

처음으로 차를 타고 떠난 교외 데이트는 내 생일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남자친구가 어머니께 오늘 내 생일이라 데이트를 간다고 말씀드린 것이 복이 되었다.

타지 생활을 하는 내가 생일날 미역국도 못 챙겨 먹었을까 걱정되신 어머니께서

당장 집으로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신 것이다.

예상치 못한 첫인사에 남자 친구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내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다.

하지만 곁에서 손을 꼭 잡아주는 남자친구 덕분에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도착한 그의 집 거실에는 온 가족이 모여 있었고, 상 위에는 나를 위한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건 밥상의 규모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어머니의 인심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고봉으로 쌓인 밥과 커다란 대접 가득 담긴 미역국은 이른바 ‘머슴밥’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모든 가족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나는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하며 그 엄청난 양의 음식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다. 다행히 평소 미역국을 좋아했던 터라 배가 터질 듯 불렀음에도

정말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그렇게 나의 생일날, 나는 예기치 못한 ‘머슴밥’과 함께 그의 가족들에게 첫인사를 드렸다.

그날 이후 나는 가끔 그의 집을 찾아가 일하러 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청소와 빨래를 거들며,

싹싹한 예비 며느리로서 나의 존재감을 조금씩 새겨 넣기 시작했다.


*gemini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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