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
1. "인터넷이 내 짝을 찾아줄 거야"
직장과 집만 오가며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직장 동료와 함께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메일 주소'가 무엇인지도 몰라,
해외에 있는 오빠가 안부를 물으며 메일 주소를 대라고 하자 당당하게
시골 집 주소를 읊던 '컴맹'이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채팅 붐이 일면서 저에게도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습니다.
얼굴은 모르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마냥 즐거웠지요.
언니와 형부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며 걱정했지만, 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걱정 마! 인터넷이 내 짝을 찾아줄 것 같거든."
지금 생각하면 참 겁도 없고 순수했던 시절이었습니다.
2. 10년 만의 재회, 종로 서점 앞의 떨림
그러던 중 우연히 동창을 찾을 수 있는 사이트에서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한다며 연락처까지 남겨두었더군요.
낯선 서울 하늘 아래 동창이 있다는 반가움에 고민하다가,
직장 동료의 부추김에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안녕, 나 누군지 알겠어?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는데..."
"야, 진짜 반갑다! 내 번호는 우째 알았노? 우리 한번 보자!"
얼떨결에 약속을 잡고 2000년 10월 7일,
종로의 한 서점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에 서로 못 알아보면 어쩌나,
어색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약속 장소인 국세청 건물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정돈하며 한참을 기다렸을 때,
멀리서 청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걸어왔습니다.
"어!"
"야, 한눈에 알아보겠네. 옛날 얼굴 그대로다."
"아니거든! 나 머리도 짧게 자르고 더 예뻐졌는데 어떻게 알아봤어?"
"이쁘다. 그래도 네 모습이 있어서 바로 알겠더라."
어색함을 깨려 일부러 짓궂게 굴던 제게 친구는 툭 던지듯 말했습니다.
"사실, 옛날에 내가 너 좋아했었다."
농담인 줄 알았지만,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줄줄이 꿰고 있는 그를 보며
그 진심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3. 담배꽁초와 치킨 뼈, 그리고 경상도 남자
우리는 종각에서 종로 5가까지 걷고 또 걸으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그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더니 꽁초를 길가에 휙 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참지 않고 한마디 했습니다.
"나 담배 연기 진짜 싫어해. 특히 꽁초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은 더 싫고!"
그는 깜짝 놀라며 사과했고,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저녁으로 치킨을 먹으러 갔을 때, 저는 또 한 번 그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난 누가 뼈 발라줘야 잘 먹는데, 히히."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면 "니 손은 없나?" 할 법도 한데,
그는 묵묵히 치킨 살을 발라 제 앞접시에 놓아주었습니다.
"난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는 싫어. 사랑하면 표현을 많이 해주는 사람이 좋거든."
"경상도 남자라고 다 똑같은 건 아이다. 안 그런 사람도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그는 저를 약수동 집까지 데려다주며 말했습니다.
어머니께 동창 만나러 간다고 하니 "요즘은 동창끼리 결혼도 많이 한다더라, 잘해봐라" 하셨다고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4. 15일 만의 고백, "하나는 너다"
첫 만남 이후, 우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나누며 서로의 일상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만난 지 딱 15일째 되는 날, 그가 집 앞으로 찾아왔습니다.
"자, 이거."
"어? 장미네? 근데 왜 14송이야? 우리 오늘 15일째인데."
"나머지 한 송이는 너다."
드라마 같은 고백에 가슴이 터질 듯 뛰었습니다.
그날 밤, 아쉬움에 전화를 끊지 못하는 제게 그는 쑥스러운 듯,
하지만 분명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잘 자라고... 사랑해."
그날부터 '중학교 동창'은 제 '남자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할 때까지 3년 가까이 매일 아침 제 기상 시간에 맞춰
'사랑의 알람' 전화를 걸어주었습니다.
부지런하고 따뜻한, 제가 꿈꾸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남편을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습니다.
그럼 저는 웃으며 대답하죠.
"인터넷 검색 잘해서 만났어요!"
20대 후반, 조금 늦게 찾아온 인연이었지만,
간절히 바랐던 만큼 우리는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고 행복했습니다.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사랑의 표현들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는 소중한 내 짝꿍을,
저는 그렇게 인터넷과 운명의 도움으로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