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대중교통이 있잖아
*지하철역에서 나눈 우리의 첫 입맞춤
지하철 데이트.
그것은 적은 비용으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는 우리만의
‘움직이는 아지트’였다. 가끔은 종착역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긴
여정조차 하나의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도란도란 나누다 보면,
내려야 할 목적지는 늘 너무 빨리 나타나곤 했다.
지하철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으니,
주머니 가벼운 연인들에게 이보다 안성맞춤인 데이트 장소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오직 그 사람만 보였기에,
복잡한 대중교통 데이트가 전혀 고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근무를 마치고 5호선에 몸을 실었다.
한참 사랑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열차는 종착역에 닿아 있었다.
되돌아가는 열차를 기다리며 아무도 없는 역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던 그
순간이었다.
찰나의 정적 뒤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살포시 닿았다.
예상치 못한 기습 뽀뽀에 나는 그만 ‘얼음’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은 금세 홍당무처럼 빨개졌고, 머릿속은 하얘져서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두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멈춰버린 나를 보며
그는 지금도 그때의 내 표정을 흉내 내며 웃곤 한다.
“그때 쫑알쫑알 이야기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어.”
나는 당황함에 어쩔 줄 몰랐지만, 정작 그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할까 말까’를 수만 번 고민했다고 고백했다.
돈 한 푼 들지 않아도 마음만은 풍족했던 그 시절, 지하철은 우리 사랑의 가장 큰 증인이었다.
*가까운 곳에도 우리만의 무대는 많았다.
나는 유난히 빨간색을 좋아했다.
옷장에는 빨간 티셔츠가 가득했고, 우리는 커플티를 새로 살 필요도 없었다.
당시 나만큼이나 마른 체격이었던 그에게 내 옷 중 큰 사이즈를 건네주면 맞춤옷처럼 딱 맞았다.
그렇게 빨간 커플티를 나눠 입고 지하철을 타고 관악산으로 향했다.
산책로를 걸으며 가볍게 대화나 나누려던 계획이었지만,
알콩달콩 이야기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정상에 서 있었다.
그 산행에서도 빠질 수 없는 것은 역시 사진이었다.
‘깔딱고개’를 넘나들며 흘린 땀방울 속에서 우리의 우정은 어느덧 깊은 사랑으로 단단해져 있었다.
여의도 공원 데이트 역시 잊을 수 없다.
한참을 걷다 다리가 아파질 때쯤,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업어주기로 내기를 했다.
승자는 나였다.
170cm에 55kg이라는 가녀린(?) 체격의 그였기에 혹시 내가 너무 무겁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등에 업혔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휘청이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너무 웃기면서도 짠해서 ‘앞으로 내가 정말 잘 먹여서 살찌워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60kg이 훌쩍 넘어 나를 가뿐하게 업어주는 남편을 보며, 우
리는 가끔 발걸음조차 떼지 못했던 여의도의 그날을 추억한다.
*비교는 금물, 마음을 여는 대화법
“나도 가끔은 자동차 타고 여행 가고 싶다.”
“어디 가고 싶은데?”
“바닷가. 대중교통은 너무 오래 걸리잖아. 친구들은 다들 차 타고 편하게 다니던데, 그치?”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입이 굳게 닫혔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이 없었고 얼굴엔 그늘이 가득했다.
답답한 마음에 다그쳐봐도 침묵만 돌아오자 나 역시 화가 치밀었다.
결국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던 그는 보이지 않았고, 서운함은 분노로 바뀌었다.
하지만 대화가 끊긴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던 나는 결국 그의 집 앞까지 찾아가 그를 불러냈다.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고칠 테니 제발 이유라도 말해줘.”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나직이 내뱉은 말은 예상 밖이었다.
“.........남이랑 비교하니까 그렇지.”
“뭐라고?”
“나도 차 타고 데이트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싶어. 근데 지금 형편이 안 되니까 속상해 죽겠는데, 다른 사람하고 비교까지 하니까 비참해서 화가 났어. 남자도 해주고 싶은데 못 해줄 땐 미안하고 속상하단 말이야.”
그의 진심 어린 고백에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사이에 자존심 때문에 속마음을 감추면 오해만 쌓인다는 것을, 그
리고 무심코 던진 내 말이 그의 진심에 생채기를 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 앞으론 절대 비교 안 할게. 그러니까 자기야, 앞으로는 기분이 어떤지 꼭 말로 해줘. 그래야 우리가 안 싸우지.”
그날 이후, 우리는 ‘비교’라는 단어를 사랑의 사전에서 지워버렸다.
자동차가 없어도 지하철과 버스 노선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더 많이 걷는 만큼, 우리의 추억은 대중교통의
노선도처럼 서울 곳곳으로 다채롭게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