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번, 난 점자 수업을 간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
예전에는 종이로만 활용되던 것들,
좋아진 세상을 난 최근 제대로 맛본다.
그것은 한소네와 각종 여러 기계이다.
요즘은 작은 한소네로 휴대폰 블루투스에 연결하여 점자를 쉽게 배워보는 체험을 한다.
일주일 동안 숙제를 해도 좀 더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좋은 기회가 되는 듯 싶어 가끔 난 뿌듯하다.
그런 나는 시각 장애 중증이지만 점자를 처음부터 배운 건 아니다.
성인이 되고 결혼 한 뒤 한참 뒤에야 배워본 점자.
막상 배워보니 전맹분들도 필요하지만 어정쩡하게 보이는 약시에게도 점자는 분명 필요함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늦은 나이에 강원 명진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던 생각도 난다.
어떤 이유로 가게 되었든 간에 내게는 큰 힘과 용기도 되었던 공간.
선천성 시각 장애인이지만 또한 집 근처 시설이나 특수 학교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친정 엄마는 든든한 3명의 아들들을 잘 따라갈 거라 믿은 엄마.
그렇지만 내겐 따라가긴 늘 부담 되던 학교 생활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덕에 양쪽을 다 이해하는 능력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강원 명진학교 다닐 때 하나도 보이지 않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내가 얼마나 행복한 건지를 느꼈고 더 이상 그 어떤 불만도 쉽게 지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더불어 친정 엄마에게 감사하다 느낀 건 시설에서 학교로 등교하는 친구들을 보면서였다.
그 아이들은 자주 데리러 오지 않는 부모님 때문에 사랑이 그리웠나보다.
그러다 보니 남들이 조금만 잘해줘도 푹 빠지게 되고 상처도 그만큼 쉽게 받는 걸 봤다.
그래서 친정 엄마가 고맙다.
힘들어하는 나를 더 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마음 아니었을까, 세월이 가르쳐 준 값진 교훈이다.
그런 엄마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소심함이 숨 쉴 거고 내 스스로 살아가기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점자를 더 열심히 배워 가고 싶다.
내 목소리와 글로 인해 장애인들에게는 힘을, 비 장애인에게는 이해를 도와주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꿈도 바램도 욕심도 참 많은 듯 싶다.
자라온 환경이 그러하고 지금 배워가는 공부가 그러하다.
또한, 난 사실 장애 등록도 처음부터 부모님이 해 주신 건 아니었기에 선천적 시각 장애가 서류상은 후천적이 된 것이다.
20살 되던 해 또래 친구들은 직장 생활도 하고, 마음껏 데이트도 즐기고, 가고 싶은 여행도 마음껏 갔다.
그러한 모습들을 보며 부럽기도 했고, 난 어디에도 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새로운 충격과 자책을 느꼈다.
그래서 장애인 등록을 해야겠다 마음을 잡았다.
결국 난 병원에 가서 스스로 진단받은 건 시각장애 3급이었다.
장애 진단이 지금은 병원에서 진료받고 판정은 의료보험공단이지만, 31년 전 그때는 복지가 활발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병원에서 진단 받은 것으로 판정됐었다.
그렇게 받은 20만 원이 그때 당시 작은 돈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시절이 지금도 생각난다.
서류 몇장을 주며 간호사는 "이쪽으로 가세요, 저쪽으로 가세요" 손가락으로만 가리켰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시각 장애인을 똥개 훈련 시킵니까?
내가 지금 여기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줄 압니까?"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간호사는 한 번에
일 처리를 깔끔히 해 주셨다.
받은 서류 들고 동사무소에 제출, 그후 얼마 지나 지급된 장애인증.
수첩 모양이고 겉표지는 파란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