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

by 삼육구십오

‘니 맘 다 이해해.’ 같은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정말 많이 쓴다. 그러나 아무도 날 이해 못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럼 타인을 이해하는 행위가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타인을 이해하는 건 정말로 가능할까? 과연 우리는 서로의 AT 필드를 넘어서 전부 오렌지 주스로 거듭날 수 없을까?

이해는 무엇인가? 이치 리(理)에 풀 해(解)이다. 대상을 내 논리대로 풀어낸다는 의미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타인을 내 논리대로 판단하는 것이 된다. 최근 흑백요리사에서 나폴리 맛피아가 문신이 있다고 욕을 먹은 건, 많은 사람이 나폴리 맛피아라는 타인을 자신의 논리로 풀어낸 결과다. 즉 나폴리 맛피아를 이해한 결과 첫인상이 문신에 의해 좋은 사람은 아니겠구나 하는 결론이 된 것이다. 이것이 타인을 이해한 결과다. 대상을 보고 당신의 논리로 해석을 만든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본질적으로 타인을 공감하거나 타인의 상황을 공감하는 것이 아닌 타인을 내 논리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니 맘 다 이해해.’라는 말로 돌아온다면 너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너의 마음을 내 논리대로 판단하겠다, 그리고 네 마음을 이미 내 논리로, 내 판단으로 흡수했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이해는 내가 본 네가 된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이해한다’의 뉘앙스에 포커스를 맞춰본다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아를 타인의 상황에 의탁해 보기쯤이 된다. 잠깐의 시뮬레이션, 아니면 간접 경험이다. 당신은 실제 상황과 똑같은 시뮬레이션을 해본 적 있는가? 진짜와 같은 시뮬레이션은 그 자체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진짜다. 0.999...와 1의 관계가 아니라 진짜, 실제 상황과 시뮬레이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경험도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으로 나누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간접 경험은 실제로 한 경험과 전혀 다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잠시간의 머릿속 시뮬레이션이고 이야기로 전해 듣는 소설과 같은 간접 경험을 두고 우린 이해했다고 말하긴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런 시뮬레이션과 간접 경험을 통해 하는 건 내가 저런 상황이면 이랬겠지 하는 막연한 추측 혹은 과거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너’가 아니라 그 상황의 ‘나’와 ‘상황’이 주축이란 말이다.

그럼 우리가 말하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말이 지니는 뉘앙스를 그대로 지니고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없다. 우린 서로의 AT 필드를 넘고 다 같은 LCL 용액이 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건 다 만화다. 사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도, 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아주 간단하다. 그가 본 풍경을 당신이 볼 수 없으니까, 타인이 될 수 없으니까, 물리적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인과 완벽하게 동일한 물리적 위치를 점유하는 것은 같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 순간은 당신과 타인이 아니라 같은 존재로 거듭난다. 그래도 이런 의문이 있을 것이다. 같은 공간 이를테면 같은 방에 동시에 있어 같은 사건을 경험한다면 그 사건 자체에서는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럼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간다면 당신은 자리를 고르지 마라. 어떤 자리든 다 같은 경험으로 그 관의 모두가 같은 이해를 획득한다면, 영화관 좌석은 그냥 랜덤으로 앉아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완벽한 이해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까지는 완벽한 이해다. 그렇다면 이해를 완벽한 수준까지 가져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우리 서로가 완벽한 이해를 하는 사회는 과연 좋을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즉 완벽한 이해를 이루는 사회는 타인이 없는 사회라는 이상한 모순에 빠진다. 그리고 타인이 당신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당신의 개인적인 시간이 없다는 의미다. 개인이 없다. ‘너’가 없으면 ‘나’도 없다. 자신만의 시간이 없고 자신의 아주 은밀한 곳까지 모두가 다 안다. 적어도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가장 친한, 가장 많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존재 모두에게 은밀히 숨기고픈 모든 진실을 알리는 것이고, 그들의 모든 숨은 진실을 목도하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이상적인 인간관계인가?

결국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건 개인 혹은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물론 일정한 수준의 이해, 일반적으로 말하는 깊은 이해가 아닌 얇은 이해는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얇은 이해야말로 우리가 가장 노력한 이해의 형태다. ‘나’라는 자아로 타인의 상황을 간접 경험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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