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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17. 2022

피맛골에서 술 마시기

내 기억이 맞다면 생전 처음 그곳에서 고갈비(고등어 갈비)를 뜯었다

30여 년 전, 어느 가을날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이면수, 고등어와 돼지고기가 타고 국과 탕 끊이는 냄새가 자욱한 피맛골 인근에서 약속한 벗들을 만났습니다. 일행 중 하나가 익숙한 발걸음으로 앞장섰습니다. 들어 선 식당에는 할머니 한 분이 주방일과 서빙을 도맡아 하는 듯했습니다.     


식당 안, 이 구석 저 구석엔 분명 할머니가 사 두진 않았을 신문이나 잡지들이 젖가슴을 풀어헤친 채 뒹굴고 있었습니다. 낡은 앞치마에 한 손을 찌르고 있던 할머니는 거슴츠레한 눈길로 낯선 우리를 퉁명스럽게 맞이했습니다.     


-뭐 처먹을 거냐? 술? 밥은 먹었냐? 밥 처먹고 술 마셔라. 오늘 동태찌개 처먹을 만하다. 퍼뜩 처먹고 집구석에 들어 가 마누라 엉덩이 껴안고 일찍 자빠져 자라.     


할머니의 거친 말에 당황한 우리에게, 이곳으로 우릴 데리고 온 친구가 눈을 찡긋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골목에 욕쟁이 할머니 집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 집이 그 집이었습니다.     


우리의 주문과 상관없이 동태찌개는 이미 끓고 있었고 소주와 기본 안주로 나온 부침개 몇 조각은 벌써 우리 입안에서 엉켜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여러 사람들이 들락거려도, 바쁠 것 하나 없는 할머닌 계속 달그락달그락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욕을 해댑니다. 할머니로부터 본의 아니게 욕을 들으신 어떤 어르신은 -이곳에 나처럼 처음 오신 듯, 할머니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붉으락푸르락 어찌할 바 몰라합니다. 할머니 욕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할머닌 술에 욕을 타서, 안주에 욕을 버무려 탁자들 위에 집어던져 놓습니다. 찌개엔 욕 육수를 쓴 듯했습니다.     


그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우리는 참 영양가 없는 소리를 서로 해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우리는 이 나라에서 희망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정치는 암울했고 민주를 외치던 주검은 사방에서 발견되었죠. 파르르 분노하면서도 영육 간에 겁에 질린 우리는 독재에 맞서지도 못하고 술의 힘을 빌려 시답지 않은 데. 칸. 쇼 같은 건만 들먹이곤 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천국의 매력은 늙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효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혁명도 죽었다. 서구 문명의 영혼도 생기도 이제 늙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니들은 안 늙을 줄 알아? 미친 것들.     


어느 틈엔가 옆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스쳐 들은 욕쟁이 할머니는 거두절미하고 늙은 사람 운운하는 우릴 싸잡아 욕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눈엔 애정이 가득 차 있는 걸, 우린 놓치지 않았지요. 시키지도 않은 물오징어 한 마리 삶아 낸 할머니의 손길에서.     



서산마루에 시들어지는 지쳐버린 황혼이 창에 드리운 낡은 커튼 위에 희미하게 넘실 거리네 어둠 속에...          (김민기의 <기지촌>)     


횡설수설하기도 하고, 작은 소리로 노랠 읊조리기도 하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그땐 식당 안에 담배도, 노래도 자유로울 때였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계산을 하려고 주머니 털어 얼마냐고 물으니, 역시 할머니의 거칠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던져졌습니다.     


-처먹고 낼 돈 있어? 얼마어치 먹었는지 난 잘 모르니까. 니들이 먹은 만큼 계산해서 돈 내고 가!     

-.........     


내 젊은 날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는 흔적입니다. 이제 그 피맛골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추억은 넓고 현실은 좁아지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말렵 사진으로 추정. 좌측이 종로통이고 우측이 피맛골 골목 



* 피맛골은 서울 종로 1~6가에 걸쳐 종로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길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馬)을 ‘피해’ 애용하던 뒷골목을 말한다. 요즘도 -도심 재개발로 예전 같지 않지만- 간혹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그 골목길 인근에 있는 청진옥 같은 곳에서 해장국으로 끼니를 때운다. 나에겐 젊음과 낭만과 좌절과 고통이 버무려진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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