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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19. 2022

3개의 유언비어

가짜 뉴스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한양은 北의 북악산과 南의 남산, 西의 인왕산 그리고 東의 낙산 등 4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조선 시대의 수도였다. 지금은 서울의 경계가 넓어져 <한양 = 서울>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을 정도로, 서울은 이제 전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격세지감이다.     


예부터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는 서의 인왕산. 그 서쪽 줄기에 금화산이라는 산이 있다. 산을 배경으로 바로 아래쪽에 옥천동이 있었고 좌측으로 냉천동 우측 밑쪽으로는 그 유명한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이 있었다. 이곳들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놀던 곳이라,  구석구석 많은 추억들이 배어 있다.  

   


1. 냉천동 마른 우물 벽화     

금화산 기슭 비탈길에 금화 시민아파트가 세워진 게 1969년 후반부터라고 알고 있다. 아파트는 아파트인데 지금처럼 고급스러운 개념은 아니었다. 서민들을 위한 산 중턱에 지은, 당시 서울 시장(김현옥)이 정권에 잘 보이려는 -박정희가 있는 청와대에서 잘 보이는- 전시용 성격이 강한 아파트였다. 그래서 기본적인 인프라는 형편없었다. 게다가 졸속으로 지어져, 간혹 붕괴 사고가 일어나 사회적 문제가 되곤 했다. -마포구 와우산 아파트 붕괴 사고가 대표적 임-     


그 근방 냉천동(冷泉洞)이라는 동네 이름의 유래는, 옛날부터 이 마을 이곳저곳에서 찬 샘물이 솟아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곳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당시는 물이 없는 마른 우물이었는데, 허술한 사다리를 타고 동네 아이들이 그 안에 들어가 놀던, 일종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그 안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그 벽화를 뜯어다(?) 팔면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땅 속 바위에 새겨진 것을 곡괭이 같은 것으로 파낸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지만, 이런 후일담이 돌고 있었다. 동네 아무개가 그 벽화 일부를 떼다 팔아, 딴 동네로 이사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물론 확인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사실 나도 궁금해 그 안에 한번 내려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어린(초2, 3?) 나이 었고, 겁도 많아 한 번도 그곳에 내려 가보지 못했고 벽화도 보지 못했다. 실지로 벽화를 봤다는 동네 형들도 말이 다들 달랐다. 누구 말이 맞는지... 혹은 누군가가 지어낸 요즘으로 말하면 ‘가짜 뉴스’ 일수 도 있지만, 가끔 그 기억이 떠오를 때면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     

(그때 용기 내어 사다리 타고 한번 내려가 볼 걸...)     



2. 서대문 형무소 비밀     

금화산은 높지 않아 사시사철 아이들의 멋진 놀이터였다. 성인이 되어 자료를 찾아보니 해발 200m가 조금 넘는, 경주 남산의 반도 채 되지 않는 산이었다. 우리는 봄여름 가을, 아카시아 꽃을 훑어 먹었다. 디저트는 산딸기였고, 약수로 목을 적셨다. 그것들이 우리들의 점심이었고 음료수였다.     


배를 채운 우리가 산길에 널린 긴 풀들로 싸리비처럼 만들어 잠자리와 제비나비를 -크기도 보통 나비의 서너 배 컸다. 멀리서 보면 마치 진짜 제비처럼 재빠르게 날랐고 몸통은 검은색이었다. 귀했고 몸짓이 빨라 잡기기 수월치 않았다- 잡겠다고 온 산을 날아다니곤 했던 시절이, 그때였다.     


그렇게 놀다가 시큰둥해지면 정상 인근에 드러누워 풀피리를 만들어 불고, 강아지풀로 친구들의 얼굴을 간질이며 뒹굴고 놀았다. 산 위에서 보는 하늘의 구름은 마치 강가의 돛단배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강아지 모양, 배 모양, 포도 모양... 구름은 하느님의 낙서장이 아니었을까?     


이쯤 되면 배를 깔고 엎드려 비밀을 풀어 보기 시작한다. 지금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라 불리고 있지만 당시엔 서대문형무소라고 불렸던 그곳을 내려다보면서. 산 위에서 바라다보면 마치 조감도라도 보는 듯, 형무소 전체 구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곳 비하인드 스토리.     


서대문형무소는 주로 조선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일본인들이 3.1 운동 직전에 만든 곳이라 했다. 그런데 이 건물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그 암호를 풀면 형무소 땅의 반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포상으로 준단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유언비어였지만, 땅 절반에 눈이 어두운 우린, 머리를 끙끙거리며 형무소를 산 위에서 째려보곤 했다.     


그땐 우리는 금화초등학교에 다니는 3, 4학년이었고, 우리 배는 금화산을 깔고 엎드려 형무소의 비밀을 풀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유는? 우린 금,은 보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 앞에, 애나 어른이나, 성인이 되어  머리 쓰는 퍼즐 같은 것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는지 모를 일이다.     



3. 독립문 벽돌 속 군자금     

그 서대문형무소에서 남서쪽으로 짧은 거리(도보로 5분 거리?)에 독립문이 있었다. 지금 있는 곳은 독립문 위로 금화터널이 건설될 때, 옆으로 조금 옮겨 다시 쌓았다는 보도를 오래전에 본 적이 있다.     


독립문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해 만든 영은문을 서재필 선생이 재 건립하면서 세워진 거다. 지금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겠지만, 우리 어릴 땐 작은 미궁 같은 놀이터였다. 마치 옛날 첨성대처럼, 아무나 기어 올라가 놀곤 했던 곳이다.     


비화는 이렇다. 일제 강점기 시절. 궁궐 인근에 살던 전직 대신이었던 갑부 김 모 대감이 작지 않은 금덩어리(돈이라는 말도 있음)를 다들 잠든 한밤중에 독립군 자금책에게 건넨다. 그것은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사용될 계획이었는데 그만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고 만다.     


자금책은 그 어둠을 헤치고 도주해 인왕산을 넘어 북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결국은 30여분 거리도 되지 않던 독립문에 숨어들어 가, 안쪽 벽돌 일부를 빼서 그 안에 그 군자금을 숨겼다. 하지만 추격하던 헌병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냉천동 마른 우물 벽화보다도, 서대문형무소 비밀보다도, 더 현실적이었고 드라마틱했다. 그것을 찾는 순간 당사자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 노다지였다. 아라비아 나이트에 나오는 황금이 숨겨진 동굴과 같은 곳이었다.     


그 당시 그 인근에 살던 아이들은 독립문에서 노느라 어둔 좁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벽돌을 하나하나 두들겨 보곤 했다. 군자금을 숨기기 위해 빈 공간을 매운 벽돌의 소리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작은 자갈을 손에 들고 ‘콩콩콩......’



                            <저 벽돌 속 어딘가에 독립군 군자금으로 쓰일 금덩어리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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