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디션

전경, 중경, 근경으로...

by 장영철 Francis

하루를 접으면서 침대에 누워 머리맡 전등을 끄고 잠들기 전에 다음날 해야 될 것들을 맘속으로 챙긴다. 해야 될 회사 업무와 관리 팀원들에게 지시할 사항들, 만나봐야 될 사람들, 도수치료 등으로 병원 예약 등등. 많을 때는 다음 날 처리해야 될 일이 열 개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들을 눈 감고 나만의 기억 연상법으로 정리해 둔다.



그러다 아주 가끔 컨디션이 엄청 좋은 날에는 머릿속 원고지에 글을 쓰기도 한다. 주제는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깊지는 않지만 얄팍하고 넓은(?) 이런저런 지식들을 소환해, 적지 않은 원고지 분량의 글을 쓴다. <언제어디서누가무엇을어떻게왜>를 베이스에 깔고서 말이다. 자주 징징거리는 글을 쓰기도 하지만 체험담 혹은 최근 읽은 책이나 본 영화, 특별히 만난 사람과의 에피소드 등, 가벼운 글도 가끔 있다.


올해도나는가보지않을거다들머리측백나무가몸을비틀어지주대에의지하고있는모습을볼때연지(蓮池)에비칠초라한스스로를보기싫어서다정자옆수령이수백년이되어보이는향나무향에취해오랫동안피폐해진내가무슨짓을저지를지모르기때문이다이맘때면배롱나무가허공을붉게물드리는있는그곳종오정에어쩌면다시는가지않을것같다아니못갈것같다그곳에서면아직여물지못한상흔이터져백일홍보다더붉은핏빛기억이다시떠오르기때문에그러기를벌써여러해가지났다여름마다상처는또도지고도진다 ... ... ...


이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할 때는 머리도 살살 감는다. 너무 심하게 샴푸를 하면 전날 밤 글들이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ㅎ. 평소보다 좀 이른 출근길에 올라 가벼운 경음악을 들으며 머릿속 글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그렇게 20여분 시간 안에 마지막으로 제목을 어떤 것으로 할까? 정하고 나면 회사 주차장이다.


사무실에 책상에 앉아 키보드로 글을 친다. 원고를 보고 치는 것보다 더 빠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보면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전날 잠들기 전에 머릿속에 써 놓은 글들을 그냥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올해도 난 가보지 않을 거다. 들머리 측백나무가... ]


10여분 정도 머릿속으로 글들을 컴퓨터로 옮기고 나서 해야 될 일은 윤문 작업이다. 수치나 연도의 정확한 확인, 혼동되는 어투를 바로 잡고, 식상한 표현 등을 가감이 삭제한다. 특별히 남의 이념 또는 종교 혹은 프라이버시를 상하게 할 표현은 철저하게 배제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하루를 여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은 글을 써냄으로 그렇게 비움으로써 맘의 응혈(凝血)을 푸는 게,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에 자주 컴퓨터 앞에 앉지만 빗장을 열어 놓기가 여의치 않은 날도 종종 있다. 요 며칠이 그런 날이었다. 일도 많고 탈도 많고... 그래서 그런지 입안이 헐고 입술이 부르터져 아리다. 게다가 쉽게 낫지 않는 오른쪽 어깨 통증도 내게 시비 중이다. (요즘 날 아프게 하는 나쁜 놈)


더위가 시작됐다. 이 더위가 끝나면 매해 그랬던 것처럼 몇몇 사진전시회에 그동안 찍은 사진을 출품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반해를 돌이켜 보니 출사를 다녀온 일이 별로 없다. 이번 대응이 녹록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오늘 새벽잠에서 깨, 침대에 누워 눈뜨지 않고 한 여름이면 반드시 떠오르는 지난 추억을 전경(全景)으로 찍어 본다. 그리고 엮긴 에피소드를 기억해 중경으로 그리고 맘속 근경으로... 그러고 나면 클로즈업한다. 그러나 그건 소망의 한 컷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스토리텔링과는, 더 이상 선을 이을 수 없다. 딱 거기 까지다. 더 이상 아무것도 찍을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맘 속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있었던 건, 오늘 아침 컨디션이 그나마 양호했기 때문이다.



9951BC3E5F35DE0A1E

<사진도 기억처럼 희미해지는가?> - 잊을 수 없던 그 해, 마지막으로 찍은 종오정 전경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꿈인지... 생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