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영철 Francis Jun 20. 2022

늙는 게 아니라, 자라는 거다

읽고 쓰고 찍고...

늘 새벽마다 그랬다. 나는 5시에 일어나면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페이크 삭스를 제일 먼저 찾아 신는다. 그리고 운동복과 샤워 후 입을 언더웨어를 챙기고, 냉커피를 보온병에 담느라 도둑고양이처럼 분주하다.


이 와중에 이 집에서 깨어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아니다. 사람은 나밖에 없지만 또 다른 존재가 있다. 페페라고 불리는 암컷 몰티즈 반려견이다. 사실 나는 동물 고기 등을  즐기지 않는다, 키우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처럼, 딸과 아들 때문에  그냥 참으며 견딘다. 그 세월이 10년 가까이 된다.


딸은 틈나는 대로 페페를 공원으로 데리고 나가 산책을 시키고 목욕도 꼭 제 손으로 씻겨 준다. 아들은 자주 페페를 자기 침대에서 데리고 잔다. 그때마다 속으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에휴... 니들 아빠 하고도 좀 놀아주지...) 애들 엄마는 매일 사료와 물을 챙겨 주고 변을 치워준다.


페페도 안다. 식구 넷 중에서 가장인 나는, 자기에게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는 걸. 그래서 그런지 그놈은 새벽에 거실에서, 나하고 눈이 마주쳐도 다가오지 않는다. 시쳇말로 개가 사람을, 개 무시한다. 사실 나도 페페가 다가와, 내게 안기는 게 달갑지 않으니, 피차 마차 쌍 마차다.


그런데 그날은 분위기가 좀 색달랐다. 뭔가 평소와는 달라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나는 금방 알아 채지 못했다. 물론 페페는 그날도 안방에서 나오는 나를, 고개 들어 돌려 보지도 않고 눈동자만 굴려 확인했다. 만일 애들 엄마나 딸이나 아들이었으면, 쪼르르 다가와 발아래서 개 복종 자세를 취했을 거다.


하여튼 헬스 가방을 챙기다 말고 나는 페페의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아, 자는 척하는 그놈을 살폈다. 뭐가 바뀐 것 같은데... 그러다가 빙~고! 알아냈다. 페페의 침대 혹은 방석 즉 잠자리가 바뀐 것이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는 이 암컷이 아주 시건방진 자세로, 그 위에 누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행복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혹 나를 비웃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설마?)


“아저씨. 이런 거 본 적 있수? 본 적 있다면 누워 보기는 했남? 이거 좀 비싼 건데 너무 뚫어지게 보지는 마쇼. 닳아유...”라고. 그때 내 입에서, 뭐 이런 개... 라는 욕이 나올 뻔했다.


평소 생활의 작은 삐걱 소리에도 겁쟁이처럼 몸을 움츠리던 페페다. 새로운 것에는 겁이 나서 절대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던 개가, 희한하게도 그날은 건방에 쩐 자세로 그 방석에서 보라는 듯 누워 있었다.


방석의 모양은 도넛 비스무리하게 생겼다. 안은 구멍이 뚫린 게 아니라 쏙 들어가면 안정적으로 오목하게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자세가 맘에 들지 않으면 머리만 내밀면 베개로 주위 테두리를 이용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베개로 쓸 수 있는 이 테두리 각도는 반려견에게 제일 편한 12도 각도란다. 세탁 후에도 솜이 뭉치지 않고 항균처리가 되어 있단다. 원단도 극세사인 벨보아 원단이라 사시사철 체온을 유지하고 피부를 보호해준다나 어쨌다나...


그날 퇴근 후 저녁 식사 시간에 아들이 내게 물었다. "마약 방석이라고 들어봤어요?" 아니. 맛있는 김밥을 마약김밥이니 하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지금 페페가 누워 있는 방석이 그 유명한 마약 방석이라는 거예요." 마약 방석???...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한 거란다.


다음 날 새벽 주말이라 황성공원 산책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나도, 페페의 마약 방석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것들을 <즐기고 탐닉하는 것들>이 있어 자주 행복(?)해 한다는 사실에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읽기다. 쓰기다. 사진 찍기다. 치기다. (캘리그래피 글자를 쓸 때 나는, 대나무 치듯 글씨를 쓴다) 걷기다. 그리고 마시기다. (뭘 마시는지는 궁금해하지 마시라) 어른도 자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늙기만 하는 게 아니다. 이때마다 나는 자란다. 더 알고 생각하고 나서 뭔가를 남기면서 말이다.


그때 불현듯 이런 마약(읽기, 쓰기, 찍기 등)이라면 지금보다 더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공자 왈(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크레타 섬을 탈출하기 위해 밀랍 날개를 단 이카로스는 욕심을 내지 말았어야 했다, 태양 가까이는 가지 말아야 했다. 맞다. 딱 여기까지만. 이 정도면 됐다, 됐어. 지금의 내 삶도 이 정도면 괜찮다.


                 <마약 방석에 누워 있는 페페. 자는 것 같지만 절대 자는 거 아님. 자는 척하는 거임>

<밀랍 날개가 태양에 녹아 이카로스는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혹? 날카로운 빛에 날개가 찢겨 죽은 게 아닐까? 만일 저 사진 바닥에서 이카로스의 밀랍 날개 잔해가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문학적인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가? 오른쪽 하단에 밀랍의 푸르뎅뎅한 흔적이... > - 황성공원








매거진의 이전글 쪽 팔리게 살지 말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