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낮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은 대낮에 살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일까? 아님은 별을 볼 수 없기에 슬픈 것일까? 보는 이마다 다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기억도 그렇다. 아름다운 기억도 있지만 슬픈 기억도 있다. 아름다운 기억만이 선이고 슬픈 기억은 악일까? 살면서 조우하는 기억은 내가 일방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 그 성격의 선택은 우리가 감당할 영역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슬픈 기억은 싫다.
사람의 기억은 보통 망각의 곡선을 타고 사라진다. 수명이 있다. 좋은 기억은 자주 회상되다 보니 빨리 닳아 버린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희미하게 그 흔적만 남는다. (개인적인 생각임) 하지만 나쁜 기억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옆구리 옆에 앉아 갈비뼈를 짓 누른다.
얼마 전 포토샵 건으로 노트북을 포맷했다. 본의 아니게 실수로 핸드폰도. 결과는 퍼펙트했다. 내 생각도 포맷했다. 아니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이나 흔적 특히 아픔은 기계와는 달리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게다가 바로 옆에 있는 것보다는, 다가갈 수 없는 것에 혹은 지나가 버렸거나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받는 마음의 아픔은 다른 그 어느 것보다 더 짙다.
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뭔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불편한 일이다. 가슴 아린 일이다. 끔찍한 일이다. 사람들은 잊힘이 쉬운 줄 안다. 시간이 지나면 평상시처럼 될 줄 안다.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가 내게 말했다. 지금 자신의 망각곡선 중 몇 줄이 끊어졌다고. 기억이 사라질 방법이 없어졌다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의 비참함에 이를 갈 것이다라고.
오랜 시간 동안 그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게는 잊어야 할 고통스러운 숫자들이 있다. 그것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속으로 다른 숫자를 세리 곤 했다.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열하나... 하나둘셋넷 ... 그러면 그 아픈 숫자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일이었다. 그러다 술이라도 몇 잔 하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빠지는 이른 저녁엔, 고통스러운 숫자가 소리 없이 다가와, 그에게속삭이며 유혹했다.
고통은 기억해야만 한다. 그것은 망각을 통해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을 통해 치유되는 것이다. 기억해 내라! 결국 술의 유혹에 빠져 숫자를 기억해 내고 만다. 그리고 술이 깨면 그가 저지른 일에 대해, 그 징징거림에 대해,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술을 멀리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시작하게 아마추어 무선이다. 그렇게 또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귀가해 지쳐 잠들었다. 그리고 그날 그가 말했던 것들 중에서 한 가닥 선이 꿈이 되어 내 온몸을 옥죄었다.
꿈속에서 그는 시티즌 밴드(Citizen Band. 생활 무전기)를 이용해 얼굴도 모르는 씨 비어(시티즌 밴드 사용자)들을 향해 CQ(교신 개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응답하는 씨비 어가 없다. 드문 일이다. 고립무원이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졌다.
꿈속 한 구석에서 서성이며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가 쓰는 메커니즘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CQ는 계속되었지만 침묵만이 함께 할 뿐이었다.
소통의 부재. 그 속에 감금되어 있는 그의 마음은 낯선 골목에서 서성거리는 <나>라는 현실적 존재로 치환된 듯했다. 나는 자신의 정황을 반성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척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 관조하는 척했다... 나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심박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불안함이 공포심으로 변질되어 과 호흡 상태에 빠진 듯했다. 그가 나지막이 신음소리처럼 읊조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는 그가 아니었다. 그가 아닌 내가 뭔가를 읊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