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늦봄인지 초여름인지 기억이 가물 하지만, 최완택 목사의 소천 소식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향년 76세. 나는 생전에 그를 만난 본 적이 없다. 내 나이 20대 중반 경부터, 글로 알게 된 그의 절친 이현주 목사의 저서에서 최완택 목사를 알게 된 것이, 그와의 인연이 시작이었다.
참고로 이현주 목사는 동화작가이며 기독교 (천주교와 개신교) 에큐메니칼 (교회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1997년 부활절에 편찬된 <공동번역 성서> 작업에, 문익환 목사와 함께 개신교를 대표한 인물이다.
서울 구로동 한 건물 3층에 신도 수가 20여 명 남짓한 민들레 교회의 담임 목사인 최 목사는 두 가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첫째는 ‘목산회’(목요일마다 산행)이다. 수십 년 동안에 수 백회를 넘겼는데 마지막 횟수는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최 목사는 아는 지인들(종교를 떠나)과 함께 전국의 산을 오르내리며 하느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한다고 했다.
둘째는 ‘민들레 교회 이야기’라는 A4를 반으로 접은 10여 쪽 주보(?)를 육필로 써 30년간 무료로 원하는 사람들에게 격주마다 우편으로 보내 주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신부, 수녀, 승려, 박사, 교수, 교사, 주부, 학생... 등 종교와 직업과 나이를 떠나 다양했다. -약 2천 여명이 주보를 직접 받아 보고, 서로서로 돌려 보기 때문에, 그 수가 수 천 명이라는 말이 있음-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냥 받기가 민망한 사람은, 헌금이나 우표를 잔뜩(?) 사다가 보내주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주보를 보낼 때 요긴하게 쓰인다고 했다. 그 주보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권정생은 단편동화 <강아지 똥>으로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서 <무명 저고리와 엄마>로 당선되고 2년 후에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는다. 그 뒤 <몽실 언니>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MBC에서 장편 드라마로 만들었고, 영화화까지 되었다. 그 외에도 그의 저서가 적지 않다.
여기까지 권 작가의 커리어를 보면, 매년 들어오는 인세만으로도 잘 먹고 잘 살았을 것 같은 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인이라는 사람은 세상 물정 잘 모르는 그의 인세를 가지고 장난을 쳤고, 그는 자신의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 드렸다. 게다가 병마와 외로움은 그의 주변에서 떠날 줄 몰랐다.
평생 흙집에서 단벌 옷으로 검소하게 살았던 그가, 타계하기 2년 전인 2005년 유언장을 작성한다. 자신의 남은 재산을 세 사람에게 부탁한다는 거였다. 그가 타계하자 그의 재산을 챙겨보니 받은, 받을 인세가 적지 않은 돈이었다고 한다.
그 유언장에 최완택 목사, 정호경 신부, 박연철 변호사가 등장한다. - 나는 지금도 권정생 작가와 최완택 목사가 어떻게 처음 서로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들을 보면 ‘끼리끼리, 초록동색, 유유상종, 동기상구’라는 말이 왜 존재하는지 알 듯도 하다. 권 작가가 남긴 유산은 그 후 이 세 사람들에 의해,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기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권정생 작가의 친필 유언장> - 이 글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주보로만 알던 최 목사를 권 작가의 유언장에서 보고 반갑기도 했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리(이현주 목사) 얽히고 저리(권정생 작가) 설키고... 인연은 이렇게라도 이어진다. 만날 사람이라면 어떻듯 만난다. 최 목사와 그렇게 알고 지낸 지 30여 년 가까이 됐다.
이현주 목사, 권정생 작가보다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내겐 그들보다 최 목사가 더 살갑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감정이라는 것은 산술적으로, 혹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담백한 글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칭 영원한 자유인이었으며, 환경 운동의 선구자라고 불렸다. 그는 손바닥만 한 예배당의 목사였지만, 사실은 하늘이 그의 예배당 천장이었고, 산야가 예배당의 바닥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죽음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의 자리 옮김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와 산행을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차라도 한잔 하고 싶었다. 밤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10 수년 전에 최 목사에게 글을 띄운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경주로 이사와 살고 있다고, 안부를 전했고 혹 언제 한번 경주에 오게 되면 종일토록 남산을 걷자고 했다. 그러나 아파트를 옮기고, 동네를 옮기면서 최 목사와의 연락이 끊겼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이사를 다니면서, 최 목사에게 내 연락처를 알리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다.
최 목사의 소천 소식을 듣고 이런저런 사연들을 되짚어 보다가 문득 울컥했다. 아등바등해 봤자 결국은 인간이라는 건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이며 ‘산다는 것은 무덤을 향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과정’이다.
지금 첨성대 인근에는 가지각색의 백일홍, 도라지, 바늘꽃(가우리), 플록스들이 한 여름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이 달이 가기 전에 화무는 십일홍이라는 말처럼 모두 시들고 말 것이다. 사람은 죽고 꽃들은 시들고 내년에 혹은 그다음 해엔... 뭐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적지 않은 꽃들이 시들어 가는 그 와중에도 코스모스 몇 송이는 고개를 살짝 들고 가을을 예고하고 있다. 왜 그것이 내게 견디기 어려운 서러움으로 다가오는지 모를 일이다. 참 사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여름 밤의 꿈처럼 우울함이 도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