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2015년. 감독/우민호)이라는 영화가 있다. 7백만 관객이 개봉관을 찾아 나름 흥행에 성공했다. 그 영화가 상영 종료된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유명한 대사가 하나 있다.
내부고발자로 나오는 조직폭력배(이병헌 扮)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한 말.
“모히또 가서 몰디브나 한잔 할까?”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어떤 사람은 웃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냥 흘러들었다.
이 말을 듣고 웃은 사람은, 휴양지로 유명한 인도양에 있는 몰디브 공화국에 가서 모히또라는 칵테일을 마시자는 말을, 무식한(?) 조폭이 거꾸로 말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히또가 술 이름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았으니, 나도 무식하기로는 매일반이다.
이렇게 우리는 아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들리고, 보인다.<아.만.보>는 ‘아는 만큼 보인다’를 줄인 말이다. 세상은 보는 대로 존재한다, 라는 말도 같은 뉘앙스다. 물론 어떻게 보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지만.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다 보니 주변 광고 등에서 보이는 카메라 앵글의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수영을 하면서부터는 워터월드를 상상하며 심심할 때마다 허공에다가 접영 리커버리를 해댔다. 차를 바꾸고 나니 도로에 나다니는 차 중에서 내 차의 차종만 눈에 띄었다.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보니 길 가다 마주치는 모든 글씨체를,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흉내 내 써 보곤 한다.
마음이 기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우울할 때는 모든 것이 슬프다. 평소 같으면 그냥 편하게 듣고 흘려버릴 노래만 해도 그렇다. 최근 우연히 자주 듣게 된 노래 <슬픔만은 아니겠지요>(해바라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김광석) <쟈클린의 눈물>(쟈클린의 첼로 연주) 등을 듣고 먹먹해한다.
그날 나는 홀로 숲길을 걷고 있었다. 슬프고 외로워 보였다. 그렇게 길을 가다 말고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내 앞에 찍힌 내 발자국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 발자국을... 마치 가련한 천애 고독자(天涯孤獨者)처럼. 그러다 잠에서 깼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자문했다. 꿈속에서 마저 왜 징징거리는가? 슬픔에 대해 뭘 알기에, 무슨 스크래치가 있기에... 슬픔은 뭘까?
슬픔은 당면한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말한다. 그 감정은 홀로 오지 않는다. 실망과 좌절감을 동반한다. 눈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너무 기가 막히면, 슬픔이 너무 깊으면, 신음소리 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마다 나는 혼절한다.
슬픔도 아는 것만큼 보이는 걸까? 혹은 경험한 만큼...
흔히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슬픔은 홀로 싸워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슬픔은 결코 남과 함께 할 수 없다. 기쁨이 외향성 정서라면 슬픔은 내향성 정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박한 말이지만 슬픔만큼 빠르게 전염되는 것도 없다. 세월은 그것을 치유할 약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슬픔을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슬픔도 알고 보면 스스로 하기 나름이다. 홀로 있다 보면 어떤 때는 상대방 때문에 쓸 수밖에 없었던 가면을 벗고 재충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두 수도자가 ‘바람의 움직임’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었다. 한 수도자는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라 하고 또 한 수도자는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그러자 그 곁을 지나던 또 다른 수도자가 그들에게 말했다. "바람이 움직인다고 보이는 것은, 다른 것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오."
맞다. 슬픔은 알기 때문에 보이는 건 아니다. 슬픔의 발원도 결국 내 예민함에서 기인함을 인정한다. 결론은 내 마음이 문제다. 멀리 크게 내다보고 살 일이다. 일상의 작은 일에 휘둘리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어긋난 시선에 아파하지 말자. 헛말에 상처받지 말자. 헛손질에 머쓱해하지 말자. 헛발질에 기대하지 말자.
울적함에 빠질 때마다 나는 나에게, 오스트레일리아의 신부이자 시인이었던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를 조용히 읊조려 준다. 내 가슴의 시린 손을 꼭 잡아 주면서.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