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백일 동안 붉게 핀다는 꽃

by 장영철 Francis

지난 일요일 모닝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때운 나는 카메라를 들고 휘적휘적 한적한 여름 길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 경북 성주 읍성 밖의 맥문동이 보랏빛 쇼울더를 걸치고 유혹스런 향을 뿜어내고 있다는 소식을 며칠 전 풍문으로 들었다. 그래서 잠시, 지난해보다 더 넓어진 황성공원 맥문동 군락지를 찾았지만 여긴 아직 보랏빛이 요원했다.


내 발길은, 경주 인근 벌써 지고 있는 연꽃과 이제 화사한 자태를 뽐내는 배롱나무 주위에서 한 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찾은 곳이 손곡동이다. 그곳에서 만난 종오정(從吾亭) 연꽃은 다른 곳과 달리 기지개를 시작했지만, 백일홍(百日紅)이라 불리는 배롱나무 꽃은 이미 떠오른 아침 해보다 더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 살면서 끝없이 사랑받는 사람 없다고 /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 목 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도종환 시인의 <목백일홍> 시다. 그날은 시인이 옆에 있다면 그의 손이라도 꼭 잡아 주고 싶은 아침이었다.


연못 옆 작은 바위에 앉아 한참 상념에 빠졌다.

(이 이른 아침에 난, 오롯이 홀로 종오정과 마주 앉아 있다. 비록 새벽잠을 설치긴 했어도 하나를 잃었기에 또 다른 하나를 얻은 것이리라... 누구든 이것도 저것도 다 내 것으로 갖고 싶겠지만 어찌 세상 이치가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할 수 있겠는가... 소유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


얼마 전 어떤 일로 받은 마음의 스크래치로, 많은 날을 글 없이... 사진 없이 살던 나는, 최근에서야 머리를 짧게 잘라 심신을 추스르고 다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오늘>을 직시하기로 다짐하던 터였다.


그렇게 눈 감고 한참을 있던 중, 종오정 아침을 만나기 위해 먼 길 온 듯한 사람들의 분주한 발자국 소리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보문을 가로질러 <동해안 가는 길> 이정표를 지나면서 항상 그랬듯이 그날도 알 수 없는 설렘으로 맘이 바빴다. 감포로 넘어가는 길을 굳이 신 길이 아닌 구 길로 택한 것은 백 년 찻집 앞 어설픈 포장마차들의 빛바랜 아련함 때문일까. 양남 길가의 어찌 보면 서럽기도 한 벽화 몇 점을 보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일요일에만 장이 선다는 장터의 정겨움을 만나 보고픈 심정이었을까.


나는 그 까닭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안락한 시공(時空)에서 안주하려는 내 나태(懶怠)는 결코 받아 드릴 수 없다. 도 시인(詩人)의 말처럼 꽃이 지고 있음에도, 꽃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나는 계속 나만의 꽃을 피우길 소망한다. 하여 틈만 되면 나는 이 산하를 바람처럼 나돌아 다닐 것이다. 그날처럼 이제 낯선 풍경 하나 없는 감포로, 신천으로, 포항으로 혹은 가물한 그 어떤 곳이라도 휘적휘적...


내 삶이 딱 백일밖에 허락되지 않더라도, 내 주위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글로 쓰고 사진으로 찍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백일홍이 오늘도 세상을 온통 붉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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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의 명옥헌 원림의 백일홍을 보지 못했지만 종오정 백일홍으로 난 충분하다 그리고 스치고 지나가는 그리움 하나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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