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기 : 결핍
완벽하려고 걱정하지 말아라. 어차피 너는 그것을 달성하지 못한다. - 살바도르 달리
엄마 뱃속에서부터 발길질이 심했던 지라 할아버지가 내가 아들일 거라 생각하며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소녀감성의 어머니는 무뚝뚝한 맏딸인 내가 자신을 닮은 남동생과 바꿔 태어났어야 한다고 말하시곤 했습니다. 커다란 덩치와 큰 키를 가진 나는, 여성성보다는 남성성이 더 강한 성격을 지닌 채,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여자친구보다는 남자친구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여전히 소통하는 남사친도 있고요. 아마도 남자들이 넘쳐나는 조선소에서 14년씩이나 보낸 덕분에, 원래 부족했던 여성성의 틈에 남성성이 충분히 차고도 넘쳤을 겁니다. 어느 회사 면접에서 CEO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인데, 여성보다 남성이 일하기 편하시죠?” 아마 나에게서 풍겨 나오는 그 ‘아우라’ 때문이었겠죠.
우리나라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핵돼 스러져가고 나서 ‘향후 100년간 여성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는 말에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습니다. 그분이 여성성을 대표하거나 여성을 위해 일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기에, 그 후로 성별이 여성인 사람은 대통령이란 5년짜리 임시직을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한 현실이 더욱 서글프게 다가왔습니다.
오랜 직장생활을 하며 여성으로서의 삶이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하는데, 그 자체가 늘 아쉬웠습니다. 지금까지 내 자신을 ‘여직원’이라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저 일하는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여성으로 바라보는지 의아했고, 세상을 돌아보면 수많은 여성들이 전쟁터와도 같은 환경 속에서 여전히 굳건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을 떠올리면 내 고민이 사소하고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나도 여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묵묵하게, 그리고 덤덤하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때로는 씩씩하게,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며, 때로는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선배 때문에 내가 눈치 보이잖아요. 동료의식이 참 없어.” 생리휴가를 쓰지 않는다 해서 후배에게, 엄마처럼 아내처럼 살뜰히 돌보지 않는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상사에게, 여직원만의 모임에 어색해하여 동료에게 핀잔을 받기도 했죠.
하지만 나는 그런 시선들을 크게 신경쓰지 않아왔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타인을 만족시키려는 강박감, 나는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되지도 않을 ‘완벽한 여자사람’으로 포장하며 스트레스에 이겨내지 못했을 겁니다. 마이클 투히그, 클라리사 옹의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에서는 완벽주의가 양자택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완벽해지려고 지나치게 노력하거나, 아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완벽주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자는 것이죠.
맞습니다. 나에게 여성성의 결핍은 내면에서 그림자처럼 존재하지만, 동시에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내 안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 아니면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고 싶은 바람이 큰 힘이 되어줬습니다. 여성성 부족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신을 충분히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용감하게 말해놓고도 여전히 불안정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불안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의 삶을 어떻게 그려갈지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분명한 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물음표를 이어가며 짧은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그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앞으로도 남은 인생을 그리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마 이 말을 가슴 속에 품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 지금 그대로여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