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얽힘을 풀다 : 억울함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마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 석가모니
사람을 괴롭게 하는 감정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억울함’은 특히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나 역시 이 감정이 내 안에서 창궐하고 범람할 때면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공직에 있을 때 특히 나의 직무수행 자격을 논하는 소문들로 인해 자다가도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벌떡 일어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세상이 나를 너무 억까('억지로 까다'의 줄임말)해’라는 표현을 통해, 나만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억울함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요. 나를 불공정하게 대하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서운함을 표현하곤 합니다.
유영근의 『우리는 왜 억울한가』에서 억울함이 '일의 책임이 자신에게 없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참 인상 깊습니다. 억울함은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는데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으면서 느끼는 분노와 답답함에서 비롯되죠.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그 억울함이 더욱 강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억울함은 결국 자기 기준에서 공정하지 않다고 느껴지거나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말에서 볼 수 있듯, 많은 사람들은 억울한 감정을 억누르고 외적인 성공을 통해 그 억울함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었던 억울함을 다른 사람에게 되갚으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당한 상처를 되새기며, 억울함을 '출세'라는 방법으로 풀려고 하죠. 하지만 여성학자 정희진은 "억울하면 바로 잡으면 되지, 꼭 출세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외적인 성취에 매몰되지 말고 본질적인 문제를 바로잡는 데 집중하자고 제안합니다. 이 말에는 정말 깊이 공감합니다. 과연 외적인 성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억울함을 해소하는 진정한 방법일까, 라는 고민을 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무게중심이 바깥에 있는 사람은 출세와 명예를 추구하며 즐거움을 찾고, 내면에 집중하는 사람은 예술, 철학, 문학을 가까이하며 고요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외적인 출세만을 목표로 삼고 외부의 인정에 의존해야 하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짧은 인생에서 우리의 중심이 밖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방향일까요?
특히 마흔을 넘기면서, 외적인 성공이나 인정보다는 내면의 성장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노력과 성취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집착하면 현실 감각을 잃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내가 겪은 억울함을 되갚는 것이 정말 정당한 일인지, 내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이때마다 이태백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억울함을 당해도 변심하지 않으면, 그때 비로소 군자임을 알게 된다.” (受屈不改心, 然後知君子)
임아영의 『떠날 수 없는 관계는 없습니다』에서 말하는 '수용'의 개념은 억울함에 적용할 때 흥미롭습니다. 수용은 단순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억울함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변화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장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큰 교훈을 얻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도적의 때는 아무 때건 벗는다."는 말이 들어맞을 순간이 오리라 믿습니다.
나의 고군분투와 질긴 노력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은 성찰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보고픈 어느 평일의 새벽, ‘사필귀정’(事必歸正) 4글자를 가슴 속에 품고 살아온 내가 그 믿음을 단순한 믿음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글쓰기를 통해 그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 길에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도 어서 만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