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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아'는 흘려보내버렷

내면의 평화와 자아 회복 : 자제심

by 변한다


자제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슴속에 깃들어 있는 욕망을 스스로 제어한다는 것이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확고히 지배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 니체

세상은 스트레스 받을 일들로 가득 차 있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아, 귀찮아.” 그런데 이 귀차니즘이 심해지면, 이게 진짜 귀찮은 일인지 아닌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워집니다. 결국 할지 말지도 결정하기 힘들어지죠. 이 혼란은 스트레스를 부르고, 그 스트레스는 또 다른 귀차니즘을 불러옵니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공직 시절, 한 문자로 인해 휘말린 송사에서 1심 판결을 받고 당혹스러움을 넘어 한동안 무기력에 빠져 "다 귀찮아."를 그렇게도 남발했던 시기가 있었죠. 내가 주로 하는 일이 남과의 커뮤니케이션인데, 문자나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지나고 보면, 그 일로 배운 것은 모든 소통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시급한 일이 아니면, 즉각적으로 연락하지 않으려 자제하게 되었고, 한 번 더 생각하고 신경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받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걱정이 쌓이다 보니, 막상 뭘 하려면 몸이 정말 귀찮아지긴 하더군요. 나 같은 열정적인 사람에게도 내 의지의 가장 큰 적은 하나, 말 안 듣는 내 몸입니다. 이른바 관성의 법칙, 항상 하던 대로 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한 번 크게 당해본 이후로 모든 일에 더 조심하려는 염려증도 생긴 것 같습니다. 사실, 걱정을 넘어서 일종의 포기나 회피일 수도 있습니다.


김병수의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요즘 어른을 위한 마음공부』에서 귀찮음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로 ‘몸을 움직이기’를 제시했습니다. 맞습니다. 제 경우, 무기력이 극에 달할 때, 우선 몸을 일으켜 장소를 바꾸려 했습니다. 집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도서관에서 읽기도 하고, 집에서 마실 수 있는 커피를 인근 카페에서 예쁜 커피잔에 담아 마시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스트래칭 운동을 아파트 피트니스센터에서 주 2회 줌바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다 보니, 모래시계의 모래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처럼, 그동안 머리를 감쌌던 묵직한 걱정과 염려들이 몸통까지 내려와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결 머리가 맑아지고, 정신이 또렷해집니다.


우리는 해보지도 않고 실패할 일부터 걱정하거나, 다가올 상처 때문에 선물 같은 오늘을 ‘귀찮다.’라는 회피형 에너지로 소비하며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려는 건 아닌지, 조금만 몸을 움직여본다면 살려면 살아집니다. 어떤 순간이든 정신줄을 부여잡고 귀차니즘을 잠시 넣어두고 걱정을 자제한다면, 우리가 크게 앞서서 염려할 일은 우리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고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극히 적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브릿 프랭크의 『무기력의 심리학』에서 찾았습니다. “정신건강은 정신이 작용하는 과정이 아니다. 정신건강은 ‘신체가 작용하는 과정’이다.” 그래요. 우리의 무력감은 그야말로 건강한 신체활동을 통해 조금씩 극복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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