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사색
국정감사, 예산안 심사 등을 앞두고 어느 당이 '권력투쟁'에 나선다는 뉴스를 보고, 실컷 뽑아줬더니만,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권력놀음이나 한다고 끌끌 혀 차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이꼴 저꼴 보고 싶지 않다며, 인디언 사회에는 왕이나 국가가 등장하지 않고 작은 부족사회를 유지했다고 국회의원을 지도자 추장처럼 명예제로 하잔다. 그래, 인디언 추장은 여느 조직의 리더라기보단 여느 가정의 어머니와 같은 포근한 존재였다. 수천만 명의 인디언들이 큰 국가로 향하지 않고, 오밀조밀 공동체 부족사회를 꾸리며 살아갔기에 그들은 잡음없이 착할 수 있었다. 그러니 결국 망하지 않았던가.
유럽인들이 가져온 균 때문에 가축을 통한 전염병이 돌았고 이로 인해 면역력이 없고 균에 대한 1도 이해가 없었던 한 인디언종은 99%까지 몰살됐다. 아마존 열대 우림의 가장 유명한 원주민 추장 중 한 분은 전통 치유 방식에만 의존하다 코로나19에 걸려 2년 전에 사망하기도 했다. 이는 변화에 대한 안이함과 무지 때문이다. 사람이 두 명 이상 모이게 되면 평등할 수 없는, 힘의 불균형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조직’이 탄생되고 국회의원은 ‘권력의 망’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권력을 쟁취하려는 투사로 변모해 본인의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지만, 인디언은 권력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하고 선함만으로 일관해 끝내 멸망했다. 아마존 추장은 현대의학을 신뢰하지 않아 죽은 거고 그래서 우리는 지식을 쌓고 지혜를 갖으며 이해를 구하는 타협점을 찾아갈 수 밖에 없다. 독서를 하는 것도 그렇고, 강의를 듣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다 같은 원리다.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보는 세상과 눈을 살짝 감고 보는 세상은 다르나, 실눈을 뜨고 보나 눈을 감으나 닥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만, 그 자체는 변할 수 없다. 맞서는가. 받아들이는가. 잠시 물러나는가. 뒤돌아 도망가는가. 딱 그 차이다. 문득 내 머릿 속을 헤집고 떠오른 한 사람이 있다. 지난 여름 사회복지 실습에서 만난 경력 20년 넘는 금융권 종사자인 그는 평생교육사와 사회복지사, 청소년상담사 등 차곡차곡 본인의 필모그라피를 쌓고 있었다. 본인의아이들을 키우면서 훈육하기 앞서 이들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뭐가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 끝에 찾은 많은 공부들을 이론과 실습으로 퇴근 후 차분히 해내고 있었다. 노력을 하니 조금씩 알아지는 것 같다는 엷은 미소에 실습이 힘들다고 툴툴 거렸던 나를 참 많이 반성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학벌에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은 어디 기업 출신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본인들은 정작 계발과 발전은 뒷전이고 퇴보를 교묘히 숨기며 운좋게 셀프피알 몇십년으로 지금껏 근근히 목숨을 연명하진 않았는지. <미안함에 대하여>의 저자 홍세화는 개인적으로 학습을 게을리하여 실력이 부족하면서도 지적 우월감과 윤리적 우월감으로 무장한 민주 건달이 되지 않을 것을 자경문의 하나로 삼고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난다. '사람이 되어야 한다. 따뜻한 사람, 나하고 가까운 우리에게만 따뜻한 사람이 아닌 넒은 우리에게 따뜻한 사람' 이 되라는 그 말씀. 우리에게는 따뜻한 시선,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시각을 견지한,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이 열망해야 할 유일한 권력은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힘이고 그로 인해 자기 자신부터 보다 객관적으로 되돌아보고, 나부터 ‘심심한 사과’ 논란에 대해 MZ세대의 문해력을 탓했던, 뭣도 몰랐던 무지와 몰이해에 심심한 사과를 솔직히 먼저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