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사색
<제대로 생각하는 기술>의 저자 기야마 히로쓰구 변호사의 모토가 나와 같다. 어려운 걸 쉽게 하자는 것. 내 경우 보도자료나 연설문, 입장문을 쉽게 쓰려면 우선 내가 알아먹어야 한다. 그러려면 생각이란 걸 하고 본인의 것으로 소화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저자는 인간의 분류를 세 가지로 봤는데 첫째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 둘째 말하면서 생각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그러니까 저자는 생각하고 말하고 적는 사람이고 싶었던 거다.
1955년 3월 12명의 사망자와 5천여명의 부상자를 낸 옴진리교 도쿄 독가스 테러 사건에서의 범인은 심장외과 의사였다. 저자는 옴진리교에 빠진 이 수재에게서 한 특징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바로 주어진 정보나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서부터 생각하는 것이란다. 즉 스스로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생각 과정 자체가 빠져있다는 것. 앞서 저자가 말한 사람의 세 분류 중 생각하지 않고 믿고 말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인 거다.
사고의 한자를 풀이하는데 기가 막히다. 생각하는 의미하는 한자 ‘思’는 밑에 마음이 있는 모양이고, 밭을 뜻하는 한자 ‘田’에는 ‘口’ 에 ‘十’ 은 마음 속으로 열 번 생각하고 나서 입으로 내뱉으라는 뜻. 생각없이 말하거나 즉흥적으로 생각하면서 말할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나서 말을 해야 한다는 거다. 성질이 급해 말보다 행동이 앞서 아둔하게도 내 발등 내가 찍기도 소인으로서 꼭 새겨들을 대목이다.
그러고보니 채사장의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서 진리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고 복잡성이라 했다. 그래서 늘 의심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 너무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크기나 부피가 너무나 압도적이라 감당불가라 하더라도 단순한 심리적 위안보다 진실의 이면을 보고 싶다면 진짜 생각이란 걸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하나의 확고한 진리관을 가진 이들이 내뱉는 말들, 즉 그 세계 밖의 것들에 대해 말할 때 주로 “이해가 안가요”, “납득할 수 없어요” 라는 유아적이고 지극히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들에 평소 주의해서 듣는 편이다. 그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더욱 확고하게 굳혀진 일종의 루틴 같은 거다. 모든 게 종편 채널의 뉴스쇼에서 패널이 양갈래로 나뉘어지듯 옳고 그름이 선명하다면 세상은 요지경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더군다나 내 이해와 납득을 일일이 구할 만큼 세상은 그럴 필요도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세상에 영원히 없는 거 세 가지 첫째 공짜, 둘째 거짓말, 마지막으로 정답. 정말 알 수 없는 건 바로 정답. 어쩌면 모른다고 도망칠 수만 있다면 그리 하는 것도 나쁘지 않는 순간들도 살다보면 있을 것이다. 단 이꼴 저꼴 죽을 때까지 보지 않을 수 있는 확신이 있다면야 뭐 알고도 모른다고 빡빡 우기며 실은 도망치는 것과 앎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결국 사과하며 한발 다가서는 것. 나는 결국 뭘 택할 것인가. 때론 비굴이 죽기보다 싫어 내 무릎이 쉽게 굽어지지 않지만, 남들이 내 정강이 뒤를 차 끝내 무릎을 꿇는 것보단 훨 낫다 싶다.
그래서 항상 겸허하고 배우는 자세로 하루하루 살아야겠다는 생각 뿐. 별 생각 없이 봤던 책에서 별별 생각이 드는 하루를 이렇게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