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서방님 말이 맞아요
1. 환할 줄 알고 호주에 왔는데 먹고살 길이 없네?
남편이 갑자기 직업이 없어졌는데 뭐 먹고살지?
본인만 믿으라는 남편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이렇게 까지 밀어붙이고 자신 있어하는데 다 생각이 있겠지. 걱정도 고민도 없이, 마냥 생각 없고 경험 없는 어린 대학생이 외국에서 결혼을 했어. 엄마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나보다 어른이라 생각하는 남편에게 돈을 주셨고, 나는 좋은 컴퓨터랑 피아노를 사라고 현금으로 주셨다. 매일 컴퓨터랑 피아노를 산다고 행복한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남편의 시선을 통해 호주를 보고 느끼고 배우며 살아온 것 같았다. 남편이 하는 모든 말을 그냥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생각했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고 짓궂던 남편이 했던 말도 안 되는 농담도 '그런 거구나, 그렇구나'하고, 아무 의심 없이 내 호주파트의 뇌를 남편의 필터를 거친 물감으로 그대로 물들였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재미있어했기도 했지만, 곤란한 적도 많았다. 누가 들어도 농담일 법한 이야기를 모두 사실로 믿어서 내가 엉뚱한 소리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니까 곤란해진 경우가 많아지다 보니, 남편이 진지하게 다시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은 안 하겠다고 했다. 대체적으로 비판적 사고를 전혀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은 전혀 없었다. 나보다 4살이나 많고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며, 호주에서 평생 살아온 사람이니 내가 그 사람을 재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거의 모든 이야기에 “서방님 말이 맞아요!”를 유행가처럼 은율까지 넣어가며 말해줬던 것 같다. 그 이야기가 정말 좋았는지 남편은 사람들 만날 때마다, 혹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말해 보라고 했다. 나는 기쁜 마음에 “서방님 말이 맞아요”를 기꺼이 항상 말해줬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주유하는 동안 나는 남편 차를 정리하고 있었다. 노란 봉투에 종이들이 잘 접혀 있었다
“이게 뭐야?” 했는데
"쓰레기야"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려 하자,
남편이 “안 돼!” 하는 거야.
놀라서 “왜? 왜 안 돼?” 그랬더니
"중요한 거야. 근데 보지 마 보지 마"
실랑이 끝에 뭔지 알아냈다. 음주운전 벌금, 주차위반 티켓, 신호위반 티켓, 속도위반 티켓 등등을 모아놓은 노란 봉투였다.
호주는 벌금이 정말 비싸고 제때 내지 않으면 이자가 어마어마하고 계속 버티면 법정에 서야 하거나 면허가 취소되기도 한다. 호주에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하도 많은 사람이 겁을 줘서 벌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덧셈을 이어나갔다. 2천 달러 가까운 금액이었다.
'어떻게 운전을 했길래 딱지를 끊어?'
'딱지를 끊었는데 심지어 제때 내지도 않아?'
'그런데 어떻게 마음이 편해?'
벌금을 지갑에 항상 있는 영수증쯤으로 취급하는 그 태도에 너무 놀랐다.
너무 놀랍고 황당했다.
“이걸 왜 안 내? 엄마가 준 돈 많이 있으니까 얼른 내”라고 했다. 그런데 돈이 없대. “엄마가 돈 많이 줬는데 왜 없어?” 그랬더니 생활비가 많이 든단다. 티켓들은 그냥 두래, 자기가 알아서 한단다.
며칠이 지나도 그 노란 봉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차에 탈 때마다 너무 신경 쓰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느 날 결심했다. 피아노 살 돈으로 벌금을 내야겠다. 피아노는 좀 나중에 사고, 컴퓨터만 좋은 거 사겠다고 했다.
"진짜 괜찮겠냐?" 하더라.
"그래도 어떻게 벌금을 안 내고 있어. 괜찮다고,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라 다 시는!!!"이라고 하고
돈을 내러 우체국으로 갔다.
10장 가까이 되는 티켓을 하나씩 스캔하는데, 내가 계산한 금액이랑 달랐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금액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했더니
"날짜가 지나 모두 비싼 가격으로 내야 한다"
뚜 두 둥..... 눈앞에서 컴퓨터까지 날아가 버렸다. 그냥 눈앞에서 컴퓨터가 부서져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당황하고 속상해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 우체국 캐셔도, 남편도 당황해하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돈을 다 계산하고 나왔다. 화가 났다. 이해가 안 됐다. 화를 내야 하는데 어떻게 화를 내야 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