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할줄 알고 호주에 왔는데 먹고 살 길이 없네?
화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잘 생각해 보니, 20년 넘게 살면서 싸움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언니들이 4명이나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싸움조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언니들이 천사처럼 착하긴 했지만, 정말 착해서만 싸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단 한 번도 의견을 조율할 일도 없었고, 얼굴을 붉히며 싸운 적도 없었다. 친구들과도 한 번도 언성을 높이며 싸운 적이 전혀 없고,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미안하다고 하고 끝냈다. 딱히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말다툼을 할 일이 없었다. 화라는 감정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내가 화가 나는데 어떻게 화를 표현할지를 모르겠는 거다. 그냥 라면 4개를 끓여 먹고 잤다. 남편은 본인이 돈을 내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며 웃으면서 장난만 치고, 답답하더라. 그런데 그 감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 하고 그냥 또 일상을 살았다.
속상했지만, 돈이 얼마 없어서 남편 아는 친구한테서 조립식 컴퓨터를 싸게 사고 나중에 좋은 거 사주겠다는 힘없는 약속만 받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알바를 하고 집에 와서 한국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자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라 한국 프로그램을 보려면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려와서 봐야 했다. 아르바이트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 떨고, 영화 보고, 비디오 빌려다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좋아하는 드라마 새로운 회차 비디오가 다 대출되지 않고 남아서 내가 빌릴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 정말 행복했다.
분명히 엄마가 돈을 많이 주고 갔는데, 맨날 돈이 없다고 했다. 나는 얼마나 생각이 없었냐면, 돈이 어디 있고 어디에 썼고 얼마나 필요한지 전혀 고민하거나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트레인 티켓을 일주일 단위로 사서 트레인을 탔는데 티켓값을 달라고 하니 그 돈이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출근을 해야 하니 급한 대로 저금통을 털었다. 정말 딱 트레인 티켓을 살 돈이 나온 거다. 정말 기뻤다. “진짜 짱이다”면서 그 돈을 들고 트레인을 타고 알바를 하러 갔다.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불안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돈이 없으면 벌면 되지, 아주 막연했다. 아르바이트하러 갈 차비도 없으면서 왜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평생 돈이 없는 게 어떤 건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돈이 없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몰랐다.
그냥 당연히 돈이 없었다. 어느 날은 남편 친구가 저녁 먹으러 온다며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봤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친구분이 잔뜩 장을 봐온 거다. 그래서 막 요리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아파트 전체가 정전이 됐다. 결국 집 앞 식당에서 친구분이 밥도 사주고 갔다. 너무 미안했다. 저녁을 먹고 정전이 돼서 깜깜한 아파트로 돌아왔는데, 정신이 멍한 느낌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러던 중 남편의 아는 형이 한국에서 마사지 베드를 수입한다고 했다. 우리에게 그걸 팔아보라고 했다. 또 양쪽 집에 조금만 도와달라고 요청해서 돈을 받아 샵을 열기로 했다. 그 당시 그 형이 남편에게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줬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한국에서 온 너의 아내를 무겁게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너의 인생에서도 물론 큰 변화겠지만, 그래도 호주에서 너에게 아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50%가 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아내에게 너의 비중은 100%라고 했다. 너만 믿고 호주를 선택한 거다. 네가 아내에게 서운하게 하거나 뭔가 잘못하면 아내의 100%가 흔들리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 무겁게 생각하고 잘하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남편은 나에게 항상 “너의 인생 전부인 너의 킹에게 잘하라”며 더 장난을 쳤다. “넌 진짜 나밖에 없다”라고, “알겠냐”라고 했다.
20년 전에 마사지 베드의 개당 가격이 4천 불이었다. 엄청 비싼 물건이었다. 오픈하고 처음엔 비싼 가격의 마사지 베드는 잘 팔리지 않았다.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샵을 냈었는데 렌트비도 나가야 하고, 베트남어를 잘하는 직원분의 주급도 줘야 했다. 돈이 떨어져 갔는지 남편이 시급이 센 곳에서 알바를 할 테니, 영어도 못하고 호주 물정도 모르는 나에게 샵을 맡기고 운영하라고 했다.
어떻게 하지? 그런데 뭐, 그냥 했다. 안되는 영어로 베트남 직원과 제품 공부하고 설명하고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하면서 매일매일 사람들에게 제품 세일즈도 하고, 우리 샵에 오시는 손님 한 분 한 분 지극정성으로 돌보니 점점 매출이 늘어났다. 나의 진심을 영어로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진심을 전하는 나만의 방법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남편은 알바를 관두고 베드 배달 및 설치를 하면서 우리는 열심히 일했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 오픈을 했고, 시드니 시티에도 다른 분이 동시에 오픈을 했는데, 당연히 시티 매출이 더 높을 거라 예상했지만 우리 샵 매출이 시티보다 좋아지니 시티 샵 운영하는 매니저 분이 우리 샵으로 계속 뭔가를 배우신다며 출장을 오셨다.
운이 정말 좋았다. 손님들이 정말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셨다. 어린부부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마사지 베드를 구매하시는 거의 모든 손님이 정말 예뻐해 주셨다. 저녁 초대도 해주시고, 하우스 파티에도 초대해 주시고, 주위 지인분에게 소개해 주셔서 장사가 정말 잘됐다.
베드 배달과 설치는 샵을 닫고 나서 남편과 함께 했는데, 무거운 건 남편이 옮기고 조그마한 부품 조립은 내가 하면서 손발이 척척 맞았다. 배달을 하면서 비싼 베드를 사는 손님의 집을 구경하고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돈이 많은 치과 의사, 변호사, 장사하시는 분들, 배 타고 망명하신 분들 등 많이 접하게 되었는데, 한 분 한 분 훌륭한 분들과 대화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도 존중에 마다하지 않으시고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과감 없이 설명해 주시고, 귀하게 대접해 주시며 인생을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 말씀해주시며 진지하게 진심으로 대해주셨다. 이렇게 하면서 부를 일구셨구나. 그때 정말 많이 배웠다.
그분들처럼 되고 싶더라. 베트남 분들은 친척들끼리 엄청 협업을 하셨다. 친척들끼리 똘똘 뭉쳐서 형제들 중 누군가는 가게를 운영하고, 누군가는 집에서 요리를 하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담당해 하교 후 활동을 책임지셨다. 돈을 모아 형제들 집을 하나하나 사 나가며 누구 하나 꾀부리지 않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작고 단단한 톱니바퀴들이 커다랗고 멋진 작품을 굴려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 엄마가 집이 어떻게 없냐며 집 사라고 돈을 주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