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넌 내 마노라가 될그야
1. 환할줄 알고 호주에 왔는데 먹고살 길이없네?
나이가 많은 엄마 아빠 밑에서 딸부잣집의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늘 내 존재 자체가 미안했다.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엄마는 엄마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았을 텐데 40살까지 아들을 위해 출산을 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나 때문에, 딸로 태어난 나로 인해 엄마가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느껴왔던 이 감정은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혔다.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엄마를 거슬리게 하지 않기 위한 인생을 살아왔었던 것 같았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재산을 두고 가족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시간은 내게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누구 편도 들 수 없었던 나는 내 방에 숨어버리곤 했다. 그런 날들을 견디며, 나는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 어느 날, 제일 친한 친구 와니가 불쑥 던진 말이 내 도망의 계기가 되었다.
“야, 그냥 호주로 갈래?”
나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바로 결심했다. 내 전공이 영어 교육학이었는데, 영어 자격증을 따서 졸업 자격을 얻겠다는 핑계를 대며 호주행 비행기 표를 샀다. 엄마는 늘 말하곤 했다. "도망가면 두 배로 힘들어진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지친 상태였다. 새롭고 낯선 곳에서 시작하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 막연히 믿었다.
21살의 나는 그렇게 호주의 땅을 밟았다.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호주로 떠나며 느꼈던 후련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옆엔 제일 친한 친구 와니가 있었고, 새로운 환경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고 같이 하숙하는 언니 오빠들 덕분에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함께 알바를 하며 매일 신나게 놀았다. 새로운 곳을 여행하면서 마냥 재밌었다.
하루는 알바를 하던 언니가 사람을 소개해 줬다. 그날 저녁, 우리는 단체 미팅 자리에 모였다. 커다란 테이블에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고, 상대방 주선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리기 지겨워하던 찰나, 주선자가 “Hello~” 하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들어왔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예의 없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인상이 좋지 않았던 나는 그저 친한 언니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깔깔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꾸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국말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무례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예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과는 별로 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가 본인을 무시하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 저녁식사 자리는 금세 해산되었고, 다 같이 클럽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신분증이 없어서 클럽에 들어갈 수 없었다. 클럽에 가는 길에 그 사람은 계속 내 손을 잡으려고 하고, 업어준다고 했다. 이상한 사람 같아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속 앞으로 걸어가며 빠르게 걷고있는데, “넌 내 마노라가 될 그야”라고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소리를 쳤다. 무서워서 소름이 끼쳤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소리 지르고 도망쳤다.
다음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엔 전화를 몇 차례 끊었지만, 결국 받았다. “어제 교통사고가 났다고, 환자니까 말 좀 들어보라”라고 했다. 깜짝 놀란 나는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문병을 오라고 했다. 어느 병원이냐고 물으니 집이라며 주소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끊었다.
그때 나는 시티에 있는 스시바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평생 알바를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일에 손이 잘 붙지 않아 혼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사장님 할머니, 할아버지가 너무 예뻐해 주셨다. 아들인 매니저 사장님이 구박해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맛있는 음식도 해주시기도 하고 이런저런 챙겨주심에 힘들어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스시바에 나타났다. 힘들었던 날 함께 얘기하면서 그가 웃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 날, 그가 나를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알바하는 곳 앞으로 왔다. 앞자리에 한 여자분이 앉아 있었는데, 그 사람의 엄마라고 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못 들으셨나 싶어 다시 인사했지만 고개를 돌리셨다. 나중에 들으니 그분은 말라깽이 서울 여자애가 싫으셨다고 했다.
차에 타지 않겠다고 했다. 어른이랑 30분이나 기다렸는데 그냥 가면 안 되지 않냐면서 한사코 타라고 했다. 30분이나 기다렸는데 인사도 안 받으신다고?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런가? 별생각 없이 차에 탔다. 그분을 도착지에 내려드리고 차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혹시 괜찮은 사람인가? 싶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다. 나는 알바를 끝내고 그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가고, 친구들 하우스 파티에도 같이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며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주와 나는 맞지 않는 것 같았고, 3개월 동안 만나고 난 후 나는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말했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할 필요 없다는 데 동의했다. 돌아오기 하루 전날 마지막 드라이브를 하자며 만났던 그는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30분을 엉엉 울었다. 함께 울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맘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도착한 나는 가족들의 재산 싸움의 여파와 마주해야 했다. 엄마는 나에게 화가 나 있었고, 눈치가 많이 보였다. 힘들었지만 학교에 복학하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와니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다음날 아침,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나는 반쯤 취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그였다. “괜찮아?”라고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내 번호 어떻게 알았냐”라고 물었다. 술에 취해 집 전화로 그에게 전화해 울고불고하며 내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모두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내 손가락을 부러뜨려야 했다고 생각했다.
시험기간에 그는 한국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의 가족들과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 아무도 22살의 나와 26살의 그를 진지하게 보지 않았지만, “잠깐 만나 봐라”라고 했다.
여름 방학 때 나는 비행기 티켓을 끊고 그를 만나러 잠깐 호주에 갔다. 그는 기찻길 옆의 시끄러운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나를 맞았다. 우리는 또 마냥 신나게 놀았다. 새벽 2시가 되면 우르르 쾅쾅 20분가량 화물 기차가 지나가는데 처음엔 무서웠지만, 나중엔 자장가처럼 들리게 했던 그 집에서 살면서, 관광 비자가 만료되기 전날, 우리는 이민 성에 가서 혼인 신고를 했다. 준비된 서류도 없이, 대충 서류 접수만 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호주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