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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모 Aug 02. 2022

냉장고의 꿈

종이박스로 단단하게 포장된 냉장고는 제법 먼 길을 이동하여 조그마한 아파트로 운반된다. 설치기사들이 종이박스와 스티로폼을 벗겨내고 주방 귀퉁이에 냉장고를 설치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남자는 냉장고를 힐끗 쳐다보더니 조용히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며 냉장고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나가버린다. 다시 덩그러니 남겨진 냉장고는 혼자서 집을 지킨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여자가 집에 들어와 냉장고를 만져본다.

“와~~ 멋지다... 고급스러운 회색이야. 그런데 요리를 못하는 내가 냉장고를 쓸 일이 있을까?”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와서 냉장고를 쓰다듬던 여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냉장고와 같이 집을 지킨다.


여자는 냉장고에 물을 넣어준다. 그리고 딸기, 사과, 배, 감 등 제철 과일을 넣어주고 간간이 야채도 넣어주며 냉장고에게 자연(自然)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여자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냉장고는 세상을 배워간다. 어떤 날은 아이스크림을 넣어주고, 어떤 날은 고등어를 넣어주고, 돼지, 소, 닭, 수박 그렇게 여자는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냉장고에게 들려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더니 남자들이 갑자기 냉장고를 꽁꽁 묶는다. 그리고 다시 제법 먼 길을 이동하여 그전보다는 제법 널찍한 아파트 주방의 귀퉁이에 놓는다. 이삿짐센터 직원은 꽁꽁 묶은 포장 천을 풀어 냉장고를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놓고 사라진다.


낯선 곳에 자리 잡은 냉장고는 두리번거리다 생전 처음 몸을 간질이는 것 같은 봄바람을 느낀다. 냉장고를 하고 위로 떠오르게 하는 꽃향기를 실은 봄바람이다. 설레는 느낌을 처음 맛본 냉장고는 마치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속삭이듯 비밀 이야기를 하듯 그렇게 바람은 계절마다 다른 이야기를 냉장고에게 전해준다. 그렇게 바람이 실어다 준 바깥세상의 소식은 냉장고의 가슴에 뜨거운 뭔가를 자리 잡게 만든다. 냉장고는 그날 이후부터 사람들이 없는 시간이면 바람과 친구가 되어 바람이 전하는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 하나를 마음에 품고 산다.


그 사이 여자는 남자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아이를 낳는다. 집에 사람이 늘어갈수록 냉장고를 여닫는 손길이 부쩍 많아진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여자는 미역국을 가득 끓여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리고 카레도 한 솥 가득 끓인 후 작은 밀폐용기를 여러 개 죽 늘어놓고 골고루 담은 후 냉동실에 보관한다. 그리고 김치며 온갖 밑반찬도 구경시켜준다. 갖가지 과일과 아이스크림도 냉장고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냉장고 문을 열 정도가 되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귤을 꺼내가고 여자 몰래 아이스크림도 꺼내 간다.

특히 남자아이는 냉장고를 지켜보는 걸 좋아한다.

어떤 날은 냉장고를 쳐다보며 볼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웃는다. 좀 더 자란 남자아이는 냉장고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여자의 눈치를 슬쩍 본다. 여자가 다른 방에 있는 걸 확인한 남자아이는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냉장고 문을 살짝 열고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고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냉장고를 쳐다본 후, 냉장고와 부엌 창 사이에 숨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냉장고는 자신을 황홀하게 쳐다보는 남자아이의 표정을 볼 때마다 잊고 있었던 ‘바람이 되고 싶다’라는 꿈을 다시 떠올린다. 세상을 더욱더 알고 싶은 냉장고는 아이들만큼이나 여자가 책 읽어 주는 시간을 기다린다. 여자가 읽어 주는 여러 가지 이야기는 냉장고가 꿈꾸던 환상 속의 이야기다.


나그네의 옷을 벗겼다는 해님, 일곱 난쟁이가 사는 숲 속의 시냇물 소리, 울긋불긋 물든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미운 오리 새끼가 떠올랐다는 푸른 하늘,... 상상만 해도 냉장고는 꿈을 이룬 듯 행복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냉장고의 이곳저곳이 아프다. 어제도 저녁 늦게 퇴근한 남자가 물을 마시고 냉장고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서 밤새 무리를 했더니 통증이 더 심해진다. 몇 년 전에도 몸이 아파 큰 수술을 했는데 수술한 곳이 다시 쑤시기 시작한다. 냉장고는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은 신음 소리를 토해낸다. 그르르륵, 크러럭, 커럭.

 냉장고에서 내뿜는 소음이 커지자 여자가 불안한 시선으로 냉장고를 보기 시작한다. 그러던 여자는 냉장고를 쓰다듬으며 걱정 섞인 말을 한다.

“어, 소리가 심하네.... 몇 년 전에 수리할 때도 이런 소리가 났는데....”

여자는 남자를 부른다.

“존슨, 또 냉장고 문 안 닫았지?”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린다.


그날 이후, 여자는 부쩍 냉장고를 쓰다듬는다. 그러고는 한숨을 자주 내쉰다. 냉장고의 신음 소리가 커지고 잦아질수록 여자의 한숨소리도 커지고 잦아진다.


그러던 어느 날, 벨이 울리고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여자는 냉장고에 있던 물건들을 서둘러 빼낸다. 그러고 나자 전자회사 직원 두 명은 냉장고를 비스듬하게 기울여 냉장고를 들고 주방을 지나 거실로 간다. 그 순간 냉장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냉장고를 마주 보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여자의 눈이 벌게지더니 눈물을 글썽인다. 그러더니 울지 않으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천장을 쳐다본다. 그런데 거실 벽 구석 쪽에 있던 남자아이도 눈물을 글썽인다. 남자아이는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다. 순간 눈물을 참던 여자와 남자아이의 눈이 마주친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은 이끌리듯 다가가 엉엉 울기 시작한다. 조그만 여자아이는 우는 모습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켜보고 있다.


냉장고는 대문을 나서며 소리친다. “울지 말아요. 하하하. 나는 이제 자연(自然)으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나는 바람이 되고 싶었어요.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바람이 되어 찾아올게요.”

여자와 남자아이가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사이 전자회사 직원은 새 냉장고를 놓고 사라진다. 겨우 울음을 그친 여자와 남자아이는 생뚱맞게 놓여 있는 냉장고를 힐끗 쳐다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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