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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unna Feb 09. 2022

트라우마가 감사해지는 미래일기

 트라우마가 감사해지는 미래일기     


  내가 10살 전후쯤이었을 때다. 한 며칠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우리 동네에는 작은 하천이 있었는데 그간 내린 비로 흙탕물이 되어 있었다. 물이 맑지는 않았지만 바닥이 드러나보였던 곳이다. 하천은 마치 폭포처럼 위에서 아래로 누런 물을 왈칵 쏟아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5살 동생은 늘 건넜던 방식대로 징검다리를 건너가려고 했었다. 거친 물살은 동생을 휘청이게 만들었고 중심을 잃은 동생은 그만 아래로 떨어져 물살에 휩싸여 떠내려갔다. 그 근처에 있던 나는 동생을 잃을까 두려운 맘에 얼른 하천 징검다리 쪽으로 뛰어갔다. 동생을 놔주지 않고 꽉 잡고 있는 물살과 싸웠다. 체급이 많이 차이나는 선수와 싸우는 기분이었다. 차갑고 더러운 물 속에서 몸을 거의 담그다시피해서 가까스로 동생의 손을 붙잡은 나는 온 몸을 다해 끌어 올렸다. 동생의 신발 한짝을 먹고서도 하천은 분이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나는 밤마다 그 하천 꿈을 꾸었다. 그 차갑고 깊고 더러운 하천물 속에 누렇고 굵은 구렁이가 서로 엉켜 우글거리는 꿈이었다.      


 트라우마에 대한 초기 감정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그 경험에 머물러서 삶을 바라보고 경험한다고 한다. 나는 날마다 그때의 감정을 스스로 재현하기만 할 뿐 새롭게 바꾼다거나 재구성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베셀 반 데어 콜크의 <몸은 기억한다: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이라는 책에는 트라우마를 앓고 있으면 정신적으로 유연성이 떨어져 상상력에서 0점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오직 흑백논리로만 판단하고 경직되고 고착된 사고만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제한된 자신의 모습, 즉 과거에 의해 만들어진 지금의 한계를 나 스스로 깰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트라우마라는 괴물을 작은 공간에 꽁꽁 닫아놓고 열쇠를 이중 삼중으로 채우고만 싶었다.     


 공포스런 기억을 봉인한 채로 살고 싶었는데 대학교 MT때 바닷가에 빠지면서 봉인이 해제되었다. 남학우들은 요리조리 피하는 나를 나눠 들고선 바닷가로 끌고 가 물 속으로 얄짤없이 내동댕이 쳤다. 나는 물 속에서 목이 졸리는 느낌을 받았고 숨이 막혀 사지를 버둥거렸다. 나의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동기들의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발에 땅이 닿았고 잿빛으로 변한 입술로 벌벌 떨면서 기어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니 신이 나서 물장구치는 아기, 파도를 즐기는 커플, 모래 사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물 속에 내동이쳐도 즐겁다고 깔깔되는 사람들...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냉정한 바다는 수박씨처럼 나를 뱉어냈다.


 이런 나를 놀리듯 물은 사람들을 신나게 만들었다. 개울가든, 계곡이든, 강가든, 바다든 말이다. 모두 들뜬 표정을 하고 텐션을 한껏 올리고 논다. 물은 과거의 나에게 아픈 기억을 주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시치미를 뚝 떼고선 나만 이상하게 만들었다. 남들은 저렇게 물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하는데, 노는 사람들 사진이나 찍어주고, 매번 짐이나 지키며 앉아 있어야 하고, 워터파크를 가도 내 수영복과 구명조끼는 물에 좀처럼 젖을 일이 없었다. 호텔 수영장을 가도 아이들을 씻겨주기 위한 보호자가 필요해서 같이 들어갈 뿐이었다. 즐겁게 노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절대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 없어!’라며 혼자 쭈구리처럼 앉아 있었다. 스탠퍼드대학교의 심리학자 캐럴 드웩은 이를 ‘고정 마인드셋’이라고 부른다. 이는 특정영역에서 결고 변화하거나 성장할 수 없다는 믿음이고 과거에 집착하는 삶을 말한다. 반대는 ‘성장 마인드셋’이다. 즉, 미래는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나에게 ‘성장마인드셋’이 있을까? 예쁜 수영복을 입고 호텔 수영장에서 자신의 수영실력을 뽐내던 지인처럼 멋지게 수영하고 싶은 내 미래모습을 상상했다. 게다가 엄마랑 같이 물놀이하고 싶어하는 우리 아이들을 떠올렸다. 내가 같이 놀자하면 나의 말에 박수치고 방방 뛰면서 난리가 날 것이다. 마치 한바탕 물놀이라도 한 듯 기분 좋은 피곤함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잠들었다.     


 엘리노어 루즈벨트가 말했다. “멈춰서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모든 경험을 통해 강인함,용기,자신감을 얻는다. ‘이런 공포를 이겨냈으니 다음에 오는 것도 문제없어.’라고 스스로 되뇌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라.” 라고 했다. 내가 즐겨 읽는 <커피 한 잔의 명상으로 10억을 번 사람들>이라는 책에서는 “만약 당신이 물을 두려워하는 공포증이 있다면, 하루 서너번씩 5분에서 10분쯤 조용히 앉아 머릿속으로 자신이 헤엄치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진짜 헤엄치듯 물의 차가움, 팔과 발의 움직임을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그 순간의 즐거움을 생생하게 느끼세요. 이것은 한낮의 허무한 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상상속에서 체험한 일은 잠재의식 속에서 반드시 현상되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다.


 물에서 할 수 있는 것 딱 1가지만 일단 해보자 정했다. 수영을 하고 싶었기에 집 앞 수영장에 일단 등록했다. 아기 수영장을 주로 이용했고 물안경을 쓰고도 눈을 감았던 나는 서서히 눈을 뜨는 연습부터 했다. 얼굴을 물에 담그는 혼자 숨참기 놀이도 했다. 새벽 수영을 가기 전 잠에서 깨면 물고기처럼 수영하는 나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상상했다. 출근해서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팔을 돌려가며 연습하기도 했다. 꼭 쥐고 놓치면 큰일 날 것 같던 킥판을 놓게 되고 자유형에서 평형, 배영. 접영 등으로 하나씩 배워나갈 때 마다 내 자신이 너무 대견했다. 특히 배영을 잘한다고 수영 강사님이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칭찬을 해주셨다. 수영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엔 내가 참 대견하다고 칭찬해주었다. 무려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이룬 성과다. 우리 아이들 앞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두 번째, 혼자 하지 말고 여러명과 함께 하자! 생각했다. 물 속을 헤엄칠때도 다른 사람들의 발이 보이면 의지가 되었다. 나처럼 물을 먹고 허우적되는 사람을 만날 때 마다 반갑고 힘이 되었다. ‘저도 그래요. 우리 힘내요!’라고 속으로 응원했다. 공포스러운 맘이 나누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물에 빠지더라도 도와줄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걱정말자 했다. 공포스러운 맘이 들 때마다 토끼의 간처럼 그 감정을 떼서 두고올 수 있다고 가정했다. ‘지금의 내 몸은 트라우마를 떼서 길가 돌 위에다 두고 왔어. 물은 너무 재미있고 즐거운 곳이야. 물이 좋아.’ 수영에 익숙해질수록 수영 자체에 몰두하게 되었다. 게다가 나보다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을 보면 괜히 자극이 되었다. 내 안의 숨어있던 경쟁본능이 기어나왔다. 


셋째, 사람들과 친해지자! 했다. 수영반 사람들이랑 친해지니 수영이 더 즐거워졌다. 강사님의 농담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수영을 끝나고 함께 모여 차를 마시고 간식도 먹고 수다도 떨었다. 나처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수영장에 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물이 무섭다고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았다. 왠지 동질감도 느끼면서 힘이 되었다. 같이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같은 수영반 사람들끼리 밴드도 결성해서 모임도 가지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물과도 친해지는 걸 느꼈다.      


 저명한 심리치료사 재스민은 “트라우마는 어느곳에나 존재한다. 우리 모두의 삶에, 그리고 온 세상에 가득하다. 사실 그 누구도 트라우마에 자유로울 수 없다. 라고 했다. 앞으로 어떤 트라우마를 만나게 될 지는 모르지만 세월과 나를 믿으면 된다. 세월은 과거라는 시련도 주지만 미래라는 치유도 준다. 깨끗한 흰도화지 같은 미래에는 트라우마를 극복한 성장한 내가 있다. 그리고 나를 믿자. 긍정심리학에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의 근력이라고도 표현되는데 시련과 실패에도 이겨내는 힘을 말한다. 회복탄력성을 키우는데는 트라우마만한 것이 없다. 트라우마가 아니었으면 내가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잠긴 문만 보고 울고 있다가 내 손에 쥔 열쇠를 그때야 비로소 보게 되니 말이다. 내가 가진 열쇠는 미래일기를 통해 보다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 감사한 마음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한 미래의 나의 모습을 담은 미래일기를 써보자. 미래의 내가 나를 토닥토닥 응원해주러 올 것이다. 물만 보면 벌벌 떨던 내가 수영을 하고 이제는 무엇에 도전할지 미래일기에 표현해보려 한다. 

    

2023. 8.5 

서핑 usa 라는 노래를 흥얼대며 나를 포함한 4명의 여자들은 강원도 양양으로 출발하고 있다. 서핑 강습을 예약해 놓았다. 35살 서진이, 45세의 나, 49세의 진영언니, 42살의 수하. 이렇게 여자 넷이서 양양까지 자율 주행을 해놓고 서핑하는 영상을 보고 있다. 각자 머릿속으로 수 십번 시뮬레이션을 해보았을 터이니 이미 수다로는 세계 최고의 서핑러다. 가상 공간에서 서핑 게임도, VR체험도 여러번 해봤다. 4박 5일동안 서핑도 실컷 즐기면서 주변을 관광할 계획이다. 우리 4명은 모두 작가다. 이번 서핑 경험을 어떻게 글로 녹여낼지 무척 기대가 된다. 우리 4명은 작가로써 서로 정보를 교류하면서 공부하는 모임을 쭉 이어오고 있다. 서핑을 타는 나의 멋진 모습과 글을 nft로 남길 예정이다. 물에서 놀 생각을 하니 얼굴이 물광을 내며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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