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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unna Jul 01. 2022

하이~ 트라우마!

내 삶을 리딩한 트라우마 

<내 삶을 리딩한 트라우마>



1. 하이~ 트라우마!




“꼬끼오~~ 꼬끼오~~”



새벽을 알리는 우렁찬 닭소리는 아날로그 모닝콜이다. 옛날 영화를 보면 닭이 울면서 서서히 동이 터오르면 귀신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취를 감춘다. 어둠을 물러가게 하고 희망찬 하루 시작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닭소리는 사실 수탉소리인 것이다. 온몸에 화려한 치장을 한 수탉이 왕관처럼 멋진 닭벼슬을 쓰고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마당을 성큼성큼 걸어다닌다. 




그러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여성들의 교육기회와 사회진출은 남자들에게 우선 기회가 갔다. 가부장시대의 여자들은 남자들의 그늘에서 살았다. 모든 의사 결정권은 남자에게 있었고 순응해야 편했다. 별 볼일 없는 남자도 불알 두쪽 달고 나오면 함부로 큰소리도 치고 기고만장해졌다. 그런 시대에 나는 첫 결혼생활을 했다. 부모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이다.    

       



1-1 나의 첫 번째 결혼생활       



  

누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꾼다.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실 때는 분명 행복한 삶을 꿈꾸셨을 것이다. 하지만 제 3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우리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 싸지른 문제 아들을 대신 이어 맡아서 키우느라 호되게 고생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아직 철도 안든 아들을 본인이 보기에도 문제가 많은데 나이가 찼다고 폭탄 돌리기 하듯 다른 귀한 딸에게 던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꼬장꼬장 자기 권리는 주장하면서 아들 가진 유세를 부린다. 아들이 잘못해도 딸가진 죄인이라는 말처럼 무조건 여자가 잘못이라는 세계관이었다. 남자의 불임도 그렇고 딸만 낳아도 무조건 여자 탓인 그런 시대였다.     

 


우리 아버지는 자기 잘난 맛에 사시는 분이셨다. 현대식 옷을 입은 조선시대 양반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이 모르는 상용한자를 쓰고 동양화를 그리시며 풍수지리와 사주를 안다고 자랑했다. 고고한 선비처럼 사시고 싶으셨겠지만 사실은 열등감으로 똘똘 뭉치신 분이라는 걸 안다. 



아버지는 자기 직장의 직급에 열등감이 있으셨나보다. 여섯 살의 내가 아버지가 일하시는 곳으로 놀러갔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절간 입구에 세워진 무서운 괴물 도깨비상의 얼굴을 하셨다. 막다른 골목길에까지 뛰어갔어도 아버지는 빗자루를 들고 끝까지 쫒아오셔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를 보고 싶어서 찾아갔던 어린 맘에 큰 상처가 되어 그 이후론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안됐다. 그러면서도 내가 즐겨보던 ‘달려라 하니’라는 만화영화를 같이 보던 아버지는 하니가 엄마~ 하면서 달리기를 할 때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묘한 이질감같은 이상한 기분으로 아버지를 바라봤었다.  

   


아버지는 뭐가 그리 불만이고 뭐가 그리 힘드셨는지 모르겠지만 술을 자주 드시고 오셨다. 술에 취해서 그냥 주무시면 되는데 가끔 정신이 탈출한 눈동자에 분노만 한가득 담고서 아무 죄 없는 세간살이를 부수기도 하셨다. 마루와 연결된 유리창은 매번 박살이 났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살살 달래시려고 하셨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엄청난 폭언을 해대신다. 잘난척 교양있는 척 구시면서 술을 드시면 미친개처럼 변하는데 얼마나 창피하던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온 몸에 힘을 가득 넣고서 뒤에서 아버지를 결박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약한 여자임에 절망했다. 그때 처음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도 어리면 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앞 집에는 같은 학교 다니는 남자애가 살고 있는데 개네집 아버지도 술을 취해 난동을 종종 부렸다. 그 남자아이 아버지는 펄펄 끊는 된장찌개를 들고 와서는 개네 어머니 머리에 댑다 부었다. 그냥 동네가 다 그랬보였다. 이 집도 술에 취한 아버지, 저 집도 술에 취한 아버지들이 그렇게 자기 아내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여자들은 힘들다고 하소연할 때도 없었고 이혼을 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집에 피신을 도와주는 보호소 품앗이 정도밖에 못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괴물로 변해 집안을 부수고 난리를 떨까봐 늘 긴장상태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잘 클 수 있었던 건 자식을 끝까지 지키고 열심히 살려고 억척을 떨었던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늘 힘이 되주고 싶었지만 나는 너무 어렸다. 



나는 엄마가 몇 번이나 짐보따리를 사서 탈출하시려고 했던 것을 안다. 9살쯤 동네에서 친구들이랑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을 때다. 왠지 모를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니 엄마가 저 멀리서 짐보따리를 들고 서서 나를 아련하게 보시고 계셨다.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엄마~”하고 불렀다. 엄마는 마치 마취가 풀린 듯 정신이 드신 표정으로 가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집으로 향하셨다. 




그 후로도 엄마는 몇 번이나 짐 보따리를 싸셨다. 그러나 자식새끼 때문에 결국 탈출을 못하셨다. 항상 가시기 전에 우리를 보셨고 늘 우리에게 들켰다. 심한 충격으로 내 기억이 완곡해진것인지 지워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같이 놀 던 여동생이 말하길 내가 신발도 벗겨지는 줄 모르고 큰 소리로 울면서 엄마를 향해 뛰어갔다고 한다. 동네가 떠나갈 듯 울면서 전속력으로 엄마에게 달려갔다고 하는데 내 기억에는 없다. 너무 충격이라서 내 뇌가 알아서 자동으로 지운걸까? 내 기억으로는 그냥 떠나려는 엄마를 보았었고 엄마는 떠나가지 않았다는 것만 안다. 




그렇게 엄마는 날개옷을 빼앗겨 아무데도 못가는 선녀처럼 그대로 주저앉아 우리들을 묵묵히 키워주셨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더 억척스러워지기로 결심하신 듯하다. 그런 어머니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버지는 더 격렬하게 주사를 벌리셨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계셨던 어느 벌건 대낮에 나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시지 마시라고 용기내어 이야기했다.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흰자가 갑자기 노래졌다. 검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식이고 뭐고 필요없다며 곁에 있던 운동기구를 손에 잡으셨다. 설마 나에게 살인무기같은 운동기구를 던지실까 잠깐 기대도 했지만 운동기구는 나를 향해 던져졌고 나는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대문을 향해 뛰었다. 맨발로 골목길을 달리는 나는 친구들을 만날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버지가 달려오지 않는 것을 알고 나는 우리집 대문 밖에서 엄마가 언제 오실지 기다렸다. 




나는 우리집이 점점 부끄러졌고 친구들을 만나도 아빠의 주사가 생각나 기가 죽었다. 항상 가슴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내 맘 속에 있었다.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던 친구들의 집에 놀러가면 아빠들이 모두 친절하고 다정했다. ‘왜 나는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 아빠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집은 왜 이럴까? 이런 집구석에서 공부를 잘한들 무슨 소용있을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죽고싶다.’라고 생각했다. 매번 개판으로 폭격 당하는 집구석, 줄줄이 어린 동생들, 힘들어하는 엄마, 답이 없었다.      




 나의 트라우마는 사람들과의 고립을 만들었다. 행복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나로 말이다. 이 세상사람들과 나는 다른 종족 같았다. 그러나 진정으로 고립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누구보다 사람과 사랑을 갈구했지만 내 안에 담겨진 묵직한 덩어리는 내 삶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상을 타오고 친구들과 즐겁게 놀고 와도 나는 또 쉽게 쪼그라들었다. 난 항상 나를 과소평가했고 내가 한 선택을 못 믿었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그냥 숨쉬고 살았다.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결혼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를 만나 결혼한다면 다정다감하고 나를 존중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적어도 술먹는 남자랑은 결혼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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