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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unna Dec 11. 2023

6학년 담임 선생님

   우리 반에는 부잣집 친구가 많았다. 걔들은 외모도 뛰어났고 공부도 잘했다. 부모는 때때로 교실에 간식을 돌렸고, 선생님들 간식과 선물까지 따로 챙겼다. 특히 자식이 상을 타거나, 성적이 오르거나, 학급이나 전교 임원으로 당선되는 날에는 교실은 마치 잔치 분위기가 됐다. 2학기 때 끝까지 반장을 거부했으나 결국 부반장이 됐을 때 아이들은 대놓고 “야! 너는 뭐 쏠 거야?” 했다. 뭔가 마뜩잖으면서도 대세에 굴복했다. 부모님을 졸라 반 아이들과 선생님께 간식을 돌렸다. 임원이 되면 골치 아프다.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학교에 자주 못 오시는데, 그러면 선생님이 싫어할 텐데….’

  ‘우리 부모님은 촌지나 선물 같은 거 하지 않으시는데...’      



   우리 부모님은 내가 그냥 알아서 학교 잘 다니겠지 하면서 무심한 편이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한껏 꾸민 채로 학교에 자주 찾아와서 청소하고, 선생님께 알랑방귀도 뀌고, 올 때마다 두 손 가득히 뭘 들고 오거나 하지 않았다. 그걸 알지 못하는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내심 나한테도 그것을 끝까지 기대했는지 모른다. 우리 선생님은 시험을 본 후 매번 반에서 평균 90점 이상인 아이들 이름을 불러 자리에서 일어서게 했다.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과 못하는 아이들을 구별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학급 임원이거나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일어선 친구들은 선택받은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일어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런 시간은 매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반에서 계속 1등을 해도, 학급 임원이 되어도 나는 달라질 게 없었다.      



   뭐 별거 없는 걸 알고 나서 담임 선생님은 나를 무슨 하녀 부리듯 했다. 나는 선생님의 수도 없는 잔심부름을 다 받아내서 해야 했다. 매일 시험지 채점부터 청소, 교실의 잡일, 빈 냄비를 들고 시장까지 가서 떡볶이 같은 간식을 사 오는 일, 복도 청소, 선생님 자리 청소 따위 말이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집으로 간 후에 교실에 남아 이런저런 선생님이 시키는 일을 해댔다. 내가 집에 가서 “엄마, 선생님이 나를 집에도 못 가게 하고 자꾸 남아서 심부름을 시켜.”라고 말한들, 메아리처럼 내 귀에만 들리는 잡소리로 끝남을 안다. 아무리 간식 심부름을 해대도 담임 선생님은 작은 것 하나 먹어보라고 나눠주지 않았다. 특히 먼 시장까지 빈 냄비를 들고 떡볶이를 담아왔을 때도 선생님은 냄비만 낚아챘지, 나보고 “수고했어. 맛 좀 볼래?”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선물이나 촌지를 준 아이에게는 웃음을 주었고, 나처럼 정상적으로 학교생활을 하는 아이에게는 무표정으로 대했다.         


  

   2학기가 된 후 얼마되지 않아 우리 반에 재숙이라는 여학생이 전학을 왔는데 알고 보니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의 딸이었다. 재숙이는 수업 시간에 이상한 짐승 같은 소리를 종종 내거나 손가락을 쫙 펴고선 가위로 자기 손가락 주변을 쿵쿵 찍었다. 팔에 벌레가 기어간다고 난리를 떨었고 가끔은 멍을 때렸다. 수업 시간에 무엇을 배웠던 그 친구와는 상관없는 것 같았다.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는 재숙이는 그냥 한마디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반 친구들은 아무리 담임 선생님 딸이라고 해도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고 선 아무도 그 친구와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짝꿍 바꾸는 날이 돌아오자 아이들은 재숙이와 앉기 싫어했고, 나는 그 친구가 가여운 나머지 내가 짝이 되겠다고 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의 입가에 미소가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 문제다. ‘이번 한 번 만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줄이야.     



  역시나 재숙이와 짝꿍이 되다 보니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였다. 한마디로 공부에 방해가 많이 되었다. 계속 움직이고 헛소리하고 다리를 떨고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책상을 치고 막 그런다. 하루는 채변 봉투에 해바라기 씨 초콜릿을 넣어와서는 나보고 보란다. 재숙이가 그런 재미있는 생각을 한다니 나는 조금 놀라웠다. 그러면서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란다. 나는 사실 재숙이가 안타까웠던 게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양육자가 자주 바뀌었다고 한다. 맞벌이 등의 이유로 그 친구는 이리저리 친척 집에 뺑뺑이 돌리듯 키워져 왔다. 애기 때부터 온전하게 엄마의 일관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 덕분에 정서적으로 늘 불안하고 제대로 케어가 안된 것 같았다. 그냥 그것이 나에게 슬픔으로 다가왔다. 재숙이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다음 달 짝꿍 바꾸는 날이 되기 며칠 전 주말에 담임 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전화했다. 마침 내가 전화를 받았는데 동네 도랑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가볍게 걸치고 간 게 화근이었다. 그날따라 날씨는 추웠고 도랑의 거침없는 바람은 드러난 내 얼굴에 계속 따귀를 날렸다. 빨리 끝날 것 같지도 않아서 벌을 받듯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고 하늘은 마치 비를 뿌릴 듯 점점 어두워졌다.

“ 니가 우리 재숙이 계속 짝해줘야겠다. 니가 한번 짝을 했으니 계속 짝해라!”

담임 선생님의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부탁이라면 어디 따뜻한 곳에 들어가서 뭐라도 먹이고 말을 하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찬바람 부는 도랑가에 애를 세워놓고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안 보이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생님은 “재숙이 공부도 가르쳐주고 화장실도 같이 가주고 늘 옆에서 잘 챙기라”라고 한술 더 뜬다. 담임 선생님은 계속 내가 굴복할 때까지 세워놨다. 만약, 부잣집 아이들처럼 뭐라도 잘 갖다 바치든가 아니면 사회적으로도 권력이 있는 집안의 아이였다면 내가 이 수모를 당했을까?   


   

   6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 되어 30년 넘게 친구로 지내는 은정이와 우연히 6학년 담임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 은정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 선생님 돈 좋아하고 선물 안 주면 사람 취급 안 하잖아. 사이코패스 같아. 지금 생각하면” 하면서 자기는 부모님이 때 되면 선물도 주고 촌지도 줬다고 고백했다. 교직에 있는 은정이는 그 선생님이 현재 교장이 되어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전했다.  


   

  아직도 그 둑방에서 서 있던 날이 떠오른다. 아직 어린 초등학생의 나는 답답한 맘이 들어도 말할 사람이 없었다. 매일 술 드시고 주사를 부리는 소통불통인 아빠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눈을 부라리고 호통을 쳤다. 3살, 6살, 9살짜리 동생들을 줄줄이 달고 생활비라도 보태야겠다면서 애들 보기도 정신없는 그 와중에 부업까지 하는 엄마는 늘 바빴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부모님은 내 말을 경청해 줄 여유 한 칸이 없었다. 온전히 나만을 바라봐줄 수 있는 시간은 늘 동생들과 겹쳐있었다.  


    

   나는 미성년자용 병 샘플을 체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본 품으로 가기 전에 체험판처럼 말이다. 우울한 맛이 살짝살짝 났지만 언제나 달라질 기회는 있었다. 단, 전제는 우리 부모님의 행복이다. 아빠가 주사를 멈추고 엄마와 행복하게 산다면 말이다. 그러나 아빠는 언제나 한결같았고 엄마는 더 정신없이 악착같이 살아야 했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빠가 술만 안 먹으면 우리 집은 행복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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