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그냥 나이를 하나하나 다 먹어가면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일인 것 같다. 열아홉 살 때까지만 해도 그냥 이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면 절대 안 될 거 같고 혹시나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그게 내 세상의 전부인 줄만 알고 살았다. 근데 고작 1년이 더 지났다고 스무 살이 된 나는 어느새 현실을 더 바라보게 된다. 좀 있으면 졸업할 텐데 취업은 어떻게 하지?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걱정부터 시작해서, 나이만 성인이고 아직도 생각은 고등학생과 다를 바 없는 나 자신과 2년 후 내가 되어있을 직장인이라는 단어 사이의 괴리감을 자주 느낀다.
나는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극도로 의존하기 않기 위해 애쓴다. 그냥 어릴 때부터 뭐든지 혼자 하는 게 익숙하고 더 편했다. 내가 부탁함으로써 상대방의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뭐든 부모님이 해주는 것보단 확실히 혼자라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경험을 쌓아나가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해본 적도, 기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거의 없다. 그래서 친구들한테 부탁할 일이 생겼을 때도 말을 잘 못한다. 생각만 해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피곤해진다. 하고 싶은 게 있거나 먹고 싶은 게 있어도 늘 꾹꾹 누르기만 할 뿐 겉으로 내뱉는 일은 현저히 없다.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하는 법만 배우며 자라서 그런가. 항상 어른되면 이거 해야지, 돈 많이 벌어서 저거 해야지, 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어른은 언제쯤 될 수 있을까? 30대? 직장인? 경제적으로 독립했을 때? 그냥 그때가 빨리 오기만을 지금으로서는 바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일은 정말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누군가 나한테 의존하는 것도 너무 싫어진다. 난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와서 자기 힘든 걸 마구 털어놓는다던가, 자기가 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나한테 대신해달라며 부탁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다. 물론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무슨 당연한 것 마냥 반복적으로 나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은 정말 별로다. 대부분 그런 류의 사람들이 나한테 기댈 때면 난 그냥 대충 비위를 맞춰주고 그들이 떠나갈 때까지 체념하며 기다리는 편인데, 이런 일이 계속되고 결국 내가 참다 참다 어깨를 빌려주지 않으면 대부분 ‘넌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바뀌냐고, 그럼 난 누구한테 이야기하냐’며 화를 낸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반은 이해가 되지만 반은 짜증이 난다. 내가 무슨 감정 쓰레기통이야? 심리상담가야? 이런 생각도 든다. 물론 주변에 얼마나 말할 사람이 없었으면 나한테 할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난 웬만하면 혼자 삼키는데 자기 힘들답시고 와르르 타인에게 제 감정을 쏟아내는 경우가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 싶다. 듣는 사람도 힘든데.
그리고 나를 오래 봤으니까 편하고 만만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막말하고 선을 넘는 장난을 치는 사람들도 정말 싫다. 아무리 친구고 편하더라도 일정 선은 지켜줬으면 하는데 그냥 얘는 착하니까~ 하는 생각으로 만만한 호구로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단지 친한 친구니까 할 말 못 할 말 구분 없이 말해도 된다는 건가? 싶다.
요즘 신경 쓸 일이 너무 많다. 성인이 되고 대학교에 입학한 뒤로 더 바빠진 것 같다. 대학교는 정말 중학교나 고등학교와 많이 다르다. 누가 알림장을 써주는 것도 아니고 과제나 공지를 대신 알려주는 것도 아니며 내가 해야 할 일을 말해주는 곳도 아니다.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내가 알아서 정보를 찾아봐야 하고 틈나는 대로 학교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공지사항을 찾아봐야 한다. 내가 가만히 입을 벌리고 있으면 반장과 담임선생님이 정보를 떠먹여 주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남한테 신경을 안 써도 되고 그냥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 하니까 그 점은 좋다.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친구들을 억지로 사귀고 그 무리 안에 나도 들어가야만 한다는 강박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아서 좋다. 이런 걸 보면 나는 확실히 중고등학교보다 대학교 체질인 것 같다
나는 변화를 꽤 즐기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고 오히려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막상 내가 안정하고 평온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마저도 두려워진다. 이런 나의 성격이 그냥 주어진 상황에 나를 고립시키고 결국 바깥세상은 구경도 하지 않는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동안 안주해있던 현실을 버리고 새로움을 과감히 택하자니 그것 또한 겁이 나는 것이 사실이다.
난 진짜 회피형 인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걸 알면서도 고칠 수가 없다. 회피형의 가장 큰 담점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로 직면해서 해결하지 않고 당장 고통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등을 돌려서 상황을 외면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성격이 급해서 즉시 처리하지만, 좀 꺼려지고 당장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 문제들은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고는 언제 해결하지… 라는 걱정만 잔뜩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한심하지만 막상 문제를 직면하려고 보면 두렵다.
가사가 좋은 노래가 좋다. 마찬가지로 대사가 좋은 영화와 드라마, 웹툰이 좋다. 개인적으로 자극적이고 잔인한 내용, 뻔한 사랑이야기, 판타지, 액션 장르는 안 좋아하는 편이다. 드라마는 달의 연인이랑 미스터 선샤인, 오월의 청춘만 가끔씩 돌려보고 있다. 생각해보면 해피엔딩 드라마는 워낙 많으니까 차라리 등장인물 대부분이 죽더라도 새드엔딩이 더 여운이 많이 남아서 시간이 지나도 계속 보게 되는 것 같다. 오늘 나의 아저씨 정주행을 했는데 역시나 몇 번을 봐도 슬프다. 현실적인 드라마를 좋아해서 생각날 때마다 보긴 하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달동네에서 카트에 탄 할머니와 지안이가 나오는 장면이나 병원에서 수화로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항상 울게 된다. 이별은 언제나 슬픈 것 같다. 물론 결말이 좋아서 다시 보는 것도 있다. 언젠가 회사원이 된 지안이와 박동훈이 다시 만나 악수하고 서로가 뒤돌아 가는 신은 워낙 유명하다.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면서도 각각 엇갈린 타이밍에 등을 돌려 상대방을 쳐다보는 장면도 좋다. 지안에게 편안함에 이르렀냐고 물어보는 동훈과 네,라고 두 번 대답하는 지안이의 목소리가 진심 같아 보여서 좋다. 그냥 지안이가 오래도록 행복했으면 한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으니 그보다 몇 배는 더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방금 유튜브 씨리얼에서 전신화상을 입으신 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봤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내가 하루아침에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정말 못 견딜 거라는 생각을 한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사지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장애인 판정도 못 받고 면접에서도 탈락시키고 보습제는 비급여 항목이라 자기 돈으로 수술비와 병원비를 다 부담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절망적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살아가는 분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더불어 지체장애나 시각, 청각장애를 가지고 계신 분들도.. 나는 눈을 감고 하루만 집에서 생활하기도 힘든데 말이다. 이럴 때 보면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고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