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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 Aug 29. 2022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내가 처음으로 솔직하게 일기를 쓰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부터였다.


초등학교 때는 매일 일기 쓰는 것이 숙제였지만 졸업을 하자 더 이상 무조건 일기를 쓰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6년이나 써 온 일기를 막상 쓰지 않자니 뭔가 허전했다. 그때 마침 선물 받은 다이어리가 있어서, 14살이 되는 1월 1일부터 내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안 좋은 감정들을 마구 썼던 것 같다. 쓰면서 많이 울기도 했었고 혹시 누가 볼까 봐 꽁꽁 숨기며 매일 일기를 썼다.


마지막 칸까지 다 쓰고 고등학생이 되자 그 다이어리를 버릴지 말지 매우 고민했다. 가끔 들춰보며 그때의 내 감정이 어땠는지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워낙 부정적인 내용이 가득해서 나는 결국 버리기를 택했다.


그 뒤로 굳이 다이어리를 사진 않았지만 일기는 계속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디다 쓸지 고민하다가 그냥 대충 스프링노트에 쓰기도 했고 노트북의 워드 파일에 쓰기도 했으며 일기 앱을 몇 개씩 깔아보기도 했다.


지금은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하는 앱 하나에 정착해서 쓰게 된 지 어언 3달 정도 지났다. 매일 쓰지는 못했지만 8월은 거의 빼먹지 않고 쓴 것 같다. 보통 오늘 하루 행복했던 일도 적고 답답하거나 짜증 났던 일도 가감 없이 적는다.


이렇다 보니 일기 쓰는 시간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원래부터 일기란 하루를 다 마친 후에 쓰는 것이라 생각해왔는데, 모닝 페이지라는 단어를 알기 시작하면서 아침 시간에 쓰는 것으로 루틴을 바꿨다. 물론 아침에 간단하게 일기를 썼어도 저녁쯤에 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추가하곤 한다.


사실 자기 전에 일기를 쓰면 잊고 그냥 잠들어 버릴 때도 많고, 하루를 돌아보았을 때 괜히 내가 잘못한 일들만 떠오르는 것 같다. 하지만 아침에 일기를 쓰면 나도 모르게 오늘 내가 기대하는 일들을 쓰게 되고, 하루 스케줄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어서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나간 날짜의 일기는 되도록 보지 않고 있다. 나는 자꾸 감정을 곱씹는 습관이 있어서 좋았든 아니든 이미 흘러간 감정이기 때문에 잊어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일기에 좋은 순간들만 쓸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아쉽게도 인생에 그런 순간들만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는 감정들까지 데려가고 싶진 않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이 순간이 다시 넘겨볼 수 있는 한 페이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때의 고민은 영원하지 않고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때 20대의 나는 이랬었지, 30대 땐 그랬지 하며 가볍게 떠올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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