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깨비불
#2.
“이봐요. 대체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형이 보냈소?”
“씨름 한 판 합시다. 형씨.”
벌써 몇 분 째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씨름 하자는 말만 반복하는 사내를 보며 혜성은 답답함을 느꼈다.
“아저씨, 형씨라는 말은 요즘 안 써요. 사투리라고 보기에는 또 어색하고... 아, 딴 나라에서 왔습니까? 형이 얼마 준대요? 예?”
“씨름 한 판 합시다.”
“하, 참..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위치추적이라도 했습니까? 아내가 이미 말했나요?”
“씨름 한 판.”
“하아.. 아저씨. 장난 하는 거면 그냥 가세요. 뭐 어디서 주워 듣고 왔나본데, 나는 이거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예? 알아들었으면 가세요.”
“씨름.”
이미 한참 전부터 여러 번 설명한 말을 반복하고만 있다는 것을 느낀 혜성은, 뭔가 허탈한 감정을 느낀 채 입을 다물었다. 폭포처럼 흘러가던 말을 멈추니, 고요해진 강변을 졸졸 흘러가는 시냇물의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는 상투적이지만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나이 처먹을 대로 먹고서 형이 무서워 이곳에 홀로 남겨져 있는 것도, 그곳에서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이런 사내에게 휘둘리고 있던 것도. 무심코 실소를 내뱉은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사내는, 아까 형 얘기를 꺼낸 뒤 처음으로 그에게 다시 대답이 아닌 말을 먼저 걸어왔다.
“형씨.”
“...예?”
“그 딴 건 아무리 고민해도 소용이 없소.”
“뭘 말하는 겁니까.”
“다.”
“....”
“전부 다 말이요.”
“.. 어디까지 알고 말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남일이라고..”
“그것도 크게 중요한 게 아니오.”
“... 그럼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사람 붙잡아 놓고서..”
이 말을 하고서 혜성은 왠지 사내가 할 말을 알 것만 같아, 말을 끊었다.
“그니까. 계속 말하고 있잖소.”
사내는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씨름 합시다. 씨름”
“아니.. 그 놈의 씨름은 왜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 겁니까? 무슨 씨름 못해서 죽은 귀신 들렸소?”
“할 거요? 씨름?”
“아니, 하.”
“할 거요. 말 거요.”
“말자면 안 할 겁니까?”
“해야지. 씨름.”
“하아...”
대체 이 남자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혜성은, 고개를 들어서 이 A.I 같은 남자의 옷이나 몸이 아닌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쳐다보았다. 불빛이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흐릿한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만은 또렷이 보였다. 범상치 않은 눈빛. 매섭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한 것도 같은 그 눈은 마치 고양이과 맹수의 눈처럼 그를 차분히, 하지만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종류의 시선에 혜성의 목줄기에서 흐른 땀이 등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사실 저 사내의 시선은 그를 보고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눈. 마치 그를 통해서 보이는 저 너머에 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오소소 돋는 소름을 느끼며, 그는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아무도 오지 않은 새하얀 백사장에 놓여 있는 느낌. 이 사내를 만나기 불과 몇십 분 전 아까까지만 해도 고민하던 것들이 지금은 새들처럼 다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자신은 벌거벗은 채 이곳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미친 소리 같았지만, 혜성은 그와 눈을 마주치고 나니 씨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게 꼭 해야만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좋소.”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지금까지 그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결심이 선 것 같군.”
돌덩이 같은 무거운 손이 혜성의 소매를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혜성은 결국 이 바보 같은 짓을 지금 하게 됐다는 생각에 왠지 입가에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3.
혜성은 차 소리와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벤치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그를 조깅을 하던 여자가 흘깃 쳐다보며 지나갔다. 아직 온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해 하천을 보고서 눈을 끔뻑이던 그의 귓가로 톡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액정으로 쓱 메시지 내용을 본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일어났다.
“악! 아야야..”
허벅지에 느껴지는 통증에 비명을 지른 그를 이번에는 다른 남자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벤치에 주저앉아 한참을 있던 혜성은 갑자기 ‘흐흐’하고 웃더니, 자리를 툭 한 번 털고선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절뚝이며 강변을 따라 걸어가는 그의 뒤로 물결은 여전히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