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채원 Nov 08. 2024

폐급 팀장

폐급 팀장

진우에게는 매우 큰 산이라 할 수 있겠으나,

사실 그리 특별한 이벤트는 아니다.

그저

내일 제출하는 보고서가

강 실장에게

“이번에는 좀 봐줄 만하네”

ㅡ라는 인정을 받는 것.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한 시도가

찬란하고도 고통스러운 이벤트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진우는,

그를 위해 오늘도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데 몇 밤을 새웠지만,

보고서를 보다 완벽히 마감해야 했고,

지체되는 퇴근에 그는 이미 지쳐 있었다.

일전에

상사인 강 실장에게 수차례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돌아오는 피드백은 언제나 부족하다는 말뿐이었다.

이번에도 강 실장이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완벽에 대한 강박과 그 굴레에 빠져

낯빛은 더더욱 어두워져 갔다.


다음 날 아침,

진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강 실장 앞에 다시 섰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보고서를 조심스레 제출했다.

강 실장은 서류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진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나?”

강 실장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의 표정에는 이번에도 실망이 서려 있었다.


진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실장님,

이번 보고서는 저희 팀이

며칠 밤을 새워가며 준비한 것입니다.

지난 5개년 데이터와 비교하면서

시장 소비자의 소비 트렌드 분석은 물론이고

광고 문구와 광고 모델 등등

다양한 섹션 별 수익 연계 구조와 이미지까지

가능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는데...”


강 실장은 말을 끊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수고한 건 알겠어.

그런데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물론,

보고서를 보면 당신이 최선을 다했는지는 보여.

근데 우린 광고 대행사야.

물론 소비경향? 알면 좋지.

근데 말이야…“


밤을 새워서 그런가,

진우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으려나,

진우의 머릿속에 한 가지 말이 꽂혔다.


“진우 씨, 듣고 있어?

그니까 내 말은,

최선이 곧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거야.

회사에서 우리가 원하는 건 성과야, 진우 씨.

우리가 바라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진우는 강 실장의 말에 속이 답답해졌다.

순간 눈가에 눈물이 돌았으나,

그는 억울한 마음을 숨기고 다시 말을 꺼냈다.


“저도 회사가 요구하는 성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주어진 조건과 자원 안에서

이만큼의 분석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어떤 부분이 더 필요하신지 말씀해 주시면

다음에 좀 더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마음은 숨기지 못하고 새어 나왔다.

강 실장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진우 씨, 회사가 자원을 충분히 주지 않았다는 불만인가?

이 일은 애초에 자원 탓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 문제야.

내가 보기엔,

다른 팀들은 비슷한 조건에서도 성과를 내는데.

왜 유독 기획 2팀만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모르겠군.”


강 실장의 말을 듣고 진우는 더 이상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수많은 야근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모두의 노력이 한순간에 폄하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며 말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강 실장은 그럴 시간조차 주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진우 씨,

나는 당신이 좀 더 현실을 직시했으면 좋겠어.

아무리 고생했다고 해서 그게 곧 성과로 이어지진 않아.

회사는 결과를 보는 곳이야.

과정은 누구도 관심 없다고.

그걸 아직도 모른다면, 이 회사에서.

아니, 그 어디를 가도 성공하기 힘들걸.”


강 실장의 논리적으로 빈틈없는 충고에

그 순간 진우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과정은 누구도 관심 없다고.

어디를 가도 성공하기 힘들걸.

그는 강 실장의 마지막 말을 뇌리에 새긴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매일같이 팀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 대화 자체는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믿고 따르는 팀원들,

그들의 노력이 무의미해지게 한 것이 팀장으로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죄책감을 불러왔다.

그래서 그는 더욱 지쳐왔었고,

결국 오늘,

그는 스스로가 무가치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진우는,

책상에 앉아 다시 한번 보고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고쳐도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그는 드디어,

감옥 위에 보고서를 내려두면서

그저 기계처럼,

감옥에서 살아가는 삶에 무가치함을 느꼈고,

처음으로 정시 퇴근을 하고자 결심했다.

이전 01화 0831746, 김진우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