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급 팀장
진우에게는 매우 큰 산이라 할 수 있겠으나,
사실 그리 특별한 이벤트는 아니다.
그저
내일 제출하는 보고서가
강 실장에게
“이번에는 좀 봐줄 만하네”
ㅡ라는 인정을 받는 것.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한 시도가
찬란하고도 고통스러운 이벤트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진우는,
그를 위해 오늘도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데 몇 밤을 새웠지만,
보고서를 보다 완벽히 마감해야 했고,
지체되는 퇴근에 그는 이미 지쳐 있었다.
일전에
상사인 강 실장에게 수차례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돌아오는 피드백은 언제나 부족하다는 말뿐이었다.
이번에도 강 실장이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완벽에 대한 강박과 그 굴레에 빠져
낯빛은 더더욱 어두워져 갔다.
다음 날 아침,
진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강 실장 앞에 다시 섰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보고서를 조심스레 제출했다.
강 실장은 서류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진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나?”
강 실장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의 표정에는 이번에도 실망이 서려 있었다.
진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실장님,
이번 보고서는 저희 팀이
며칠 밤을 새워가며 준비한 것입니다.
지난 5개년 데이터와 비교하면서
시장 소비자의 소비 트렌드 분석은 물론이고
광고 문구와 광고 모델 등등
다양한 섹션 별 수익 연계 구조와 이미지까지
가능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는데...”
강 실장은 말을 끊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수고한 건 알겠어.
그런데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물론,
보고서를 보면 당신이 최선을 다했는지는 보여.
근데 우린 광고 대행사야.
물론 소비경향? 알면 좋지.
근데 말이야…“
밤을 새워서 그런가,
진우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으려나,
진우의 머릿속에 한 가지 말이 꽂혔다.
“진우 씨, 듣고 있어?
그니까 내 말은,
최선이 곧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거야.
회사에서 우리가 원하는 건 성과야, 진우 씨.
우리가 바라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진우는 강 실장의 말에 속이 답답해졌다.
순간 눈가에 눈물이 돌았으나,
그는 억울한 마음을 숨기고 다시 말을 꺼냈다.
“저도 회사가 요구하는 성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주어진 조건과 자원 안에서
이만큼의 분석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어떤 부분이 더 필요하신지 말씀해 주시면
다음에 좀 더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마음은 숨기지 못하고 새어 나왔다.
강 실장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진우 씨, 회사가 자원을 충분히 주지 않았다는 불만인가?
이 일은 애초에 자원 탓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 문제야.
내가 보기엔,
다른 팀들은 비슷한 조건에서도 성과를 내는데.
왜 유독 기획 2팀만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모르겠군.”
강 실장의 말을 듣고 진우는 더 이상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수많은 야근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모두의 노력이 한순간에 폄하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며 말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강 실장은 그럴 시간조차 주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진우 씨,
나는 당신이 좀 더 현실을 직시했으면 좋겠어.
아무리 고생했다고 해서 그게 곧 성과로 이어지진 않아.
회사는 결과를 보는 곳이야.
과정은 누구도 관심 없다고.
그걸 아직도 모른다면, 이 회사에서.
아니, 그 어디를 가도 성공하기 힘들걸.”
강 실장의 논리적으로 빈틈없는 충고에
그 순간 진우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과정은 누구도 관심 없다고.
…
어디를 가도 성공하기 힘들걸.
그는 강 실장의 마지막 말을 뇌리에 새긴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매일같이 팀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 대화 자체는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믿고 따르는 팀원들,
그들의 노력이 무의미해지게 한 것이 팀장으로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죄책감을 불러왔다.
그래서 그는 더욱 지쳐왔었고,
결국 오늘,
그는 스스로가 무가치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진우는,
책상에 앉아 다시 한번 보고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고쳐도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그는 드디어,
감옥 위에 보고서를 내려두면서
그저 기계처럼,
감옥에서 살아가는 삶에 무가치함을 느꼈고,
처음으로 정시 퇴근을 하고자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