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와 심신미약자는 감상에 주의를 요합니다.
무제(無題).
옛날 옛적에, 한 왕자님이 있었다.
그 왕자는 세상 밖을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전하의 슬하를 일찍 떠나 세상을 누볐다.
그는 가난한 노인과 굶어 죽을 아이들의 악취,
병자의 시체 화장 냄새가 코 난간을 무너뜨려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푸른 하늘과 교회의 푸른 종소리.
끼룩끼룩 날아가는 갈매기 소리와 바다짠내.
그리고 웃는 악사들의 흥겨운 노래.
그 모든 걸 누리는 완벽한 하루, 그리고
그 빵집가게 아저씨의 아름다운 따님.
그녀와 함께 옥탑방에서 노닥거릴
ㅡ자유.
오직 그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되려 그가 버리고 떠난 것들 덕에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가장 사랑하던 이에게 은화 10전에 배신당해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고,
결국 능지처참되어 그의 신체가 거리에 굴러다녔다.
그는 사후에 그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었다.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야
몸이 6조각으로 분리되어 온 세상을 누볐다.
그의 이름은 김 씨 왕가의 21대 손.
진우이다.
폭죽이 장관이다.
그가 쓴 오글거리는 옛날이야기.
그는 구두로 그 유언장을 눌러두고 다리 난간 앞에 섰다.
평소 고소공포증이 있는 그였지만,
취기 덕인지 두려움은 일절 없었다.
그저 죽는 날의 밤하늘이 그리고 나리는 눈에
그의 눈망울은 매료되었다.
세상과의 벽은 점점 두터워지고 있었다.
울리는 핸드폰 너머에
이번달 카드비 청구알람
소개팅 매칭 성공 알람
친구의 기프티콘 선물 알람
택배 도착 알람
정치여론조사 스팸 전화의 벨소리
…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닌 것이다.
…
세상의 소리는 점점 고요해져 가고,
폭죽내음이 코를 찌르고,
따뜻한 눈이 내 볼살을 가르고,
차가운 한팩이 내 손을 자르고,
자동차 경적이 내 고막을 찢고,
…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
ㅡ.
나의 죽음을 막아서는 소리
좋다.
이 얼마나 죽기 좋은 날인가.
그리고 그는 과연 독실한 신자답게 속으로 소리쳤다.
신은 죽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모든 인간은 그 목적에 따라 만드셨다는데,
나로 하여금
하찮은 인간의 발악은 사회악의 본을 보이시니
이 얼마나 주님의 은혜인가!
신은 죽지 않았다.
신은 죽지 않았다.
신은 죽지 않았다.
신은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있음으로 그분의 뜻이 완성된다.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죽일 것이다.
앞으로는 자기를 희생해 인류를 구원한 척하시더니
뒤로는 나 같은 하찮은 인간 하나의 인생을 희생시켜
인간의 끝없는 추악함과 하찮음을 비판하게 하시니
얼마나 완벽한 신이신가!
아니지, 꼭 주님만 그런 것도 아니야.
부처도 예수도 공맹도 모두 똑같이 말할 것이다.
나 같은 건 사회의 악이라고.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것이 이 수치스러운 박제와
고통스러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그 신들의 미친 계획에 크나큰 오점을 남겨
엿을 먹이리라.
잘 봐둬라 세상아,
암세포의 최후를.
그는 추움에, 그리고
자기가 사회악의 표본이 되었다는 수치심에
몸이 절로 요동쳤다.
모두 조용ㅡ.
죄수가 최후의 변론을 시작한다.
내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신을 죽이리라.
죄인의 유언은 추악하고 거추장스럽게 영각 하였으나,
그의 최후의 변론은 담담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인간으로 남고 싶었나 보다.
발버둥 치는 여타 금수(禽獸)와는 다르게 말이다.
선고한다.
죄인 김 진 우.
2024년 12월 11일.
배심원단 투표결과 10:0으로
투신형을 선고한다.
형을 집행하라.
좋다. 모든 날이 모든 순간이.
한강물은 차갑겠지.
그래도 괜찮은 인생이다.
마지막 순간엔 내가 원하는 선택을 했으니ㅡ
물은 점점 가까워지고, 몸은 가벼워진다.
비로소 투신에 대한 후회가 요동칠 때쯤
그의 귀에서 환청이 밀려 들어온다.
내일 아침 9시 뉴스에 나올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덤덤하게 나의 죽음에 관해 세상사람들에게 전하겠지.
그리고 그 사람들은, 암환자들은 기뻐할 것이다.
드디어 항암치료가 끝났고,
재발 가능성도 0%라는 희소식이니.
이름 김 진 우
生 1999~ 故 2024
인생이란 책의 제목,
무제(無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