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러나 Oct 18. 2023

0-3 어디 좋은 데 가시나 봐요

일을 버린 이야기


'이직'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1. '옮길 이' 자를 쓰는 이직. 말 그대로 직장이나 직업을 옮긴다는 것이다.


2. '떠날 이' 자를 쓰는 이직. ' 떠나다. 떼놓다. 떨어지다'라는 뜻의 한자를 써서 직장이나 직업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한다.


퇴사한다는 말을 가장 사려 깊게 받아친다면 어떤 문장이 좋을까.


'어디 좋은 데 가시나 봐요'


이상하게 그 말을 제일 많이 들었다. 이직이겠거니 생각하며 부러워하는 눈이 어딘가 부담스럽다. 상대는 '나도 데려가라', '어디로 이직하냐'는 말을 더하지만, 나는 그저 일을 떠나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퇴사는 '환승이직'이다. 원하는 곳에 '짠'하고 합격해서 더 좋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 순간을 기다린 적이 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다. 두어 개의 비싼 취미생활을 더 하고도 남을 연봉을 제안받았어도 '일'이라면 극구 손사래 칠 정도까지 와버렸다.


그래서 나는 일을 버렸다. 일에서 나를 떼어놓았고 떨어지기를 애썼다.


번아웃은, 좋게 말하면 스스로를 불태워봤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많이 태워서 타버렸다는 것이다. 고기도 굽다가 타면, 탄 것은 떼어내고 먹거나 아예 버려버린다. 나는 더는 쓸 수 없는 고기가 되기 전에 일을 잘라내었다. 나 라도 살아야 했다. 무엇 때문에 번아웃이 왔냐는 말에는 아직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은 탓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3주가 조금 넘는 인수인계를 끝으로, 일을 무정하게 버리고 제주도에 내려왔다. 오직 바라는 것은 잠자기, 햇살 받기, 멍 때리기 그리고 시계를 보지 않고 밥을 먹는 일이었다. 그저 나를 돌보는 것이 전부인 일상은 제주의 노을과 바람보다 비쌌다. 창문 밖의 날씨가 궁금해도 양배추쌈을 해 먹거나 고구마를 쪄먹는 것이 그저 행복인 며칠을 살았다. 그러다 햇살을 가득 담은 풀잎, 뜨겁게 달궈진 보닛 그리고 누군가의 발그레한 볼이 궁금해지면 이따금씩 세상에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했다.


그래도, 그 이직이던 이 이직이던 어느 쪽이던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이 어른이라고 했던가. 이 책임을 내가 다 지더라도, 그 책임을 충분히 지고도 남을 만큼 지난 시간을 잘 살아왔으니까 스스로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하다니 뿌듯하다'라고 말해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꽤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위대한 점이 두 가지나 된다.  

하나, 멈출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

둘, 멈추어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 것.


멈추는 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면, 언제 어떻게 다시 시동을 걸어도 잘 해낼 사람일 거라고 믿는다. 그저 필요한 것은 방향과 연료이니, 스스로를 충분히 채우기만 한다면 아주 잘 가게 될 거라고.

작가의 이전글 0-2 퇴사통보 20시간 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