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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러나 Oct 18. 2023

0-2 퇴사통보 20시간 전

용기 아니면 객기

인사시스템에 퇴사결재가 올라온다. 그 결재에 '처리' 버튼을 누르면, 그 사람의 퇴사는 이제 오피셜 한 것이 된다. 퇴사결재를 올리는 것은, 누군가가 회사와 헤어지기로 했다는 완전한 선언이 된다. 그 결재를 처리하는 일은 연명치료를 하던 누군가의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나의 산소호흡기를 내 손으로 떼어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사실 인사담당자에게는 상담이 많이 들어온다. 언제가 적절한 퇴사일지, 현명한 퇴사시기는 언제일지, 지금 퇴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다른 사람들의 현명한 퇴사와 의사결정을 돕던 인사담당자는, 정작 가장 비합리적인 퇴사를 선택했다. 인생 사는데 정답이 있나.




퇴사 신호 1 : 나를 잃는 것 같아


헤어짐의 시기를 정한 것은 23년 5월. 근로자의 날을 껴서 친구들과 대만여행을 간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과의 해외여행은 으레 신나고 기대되는 것 아닌가. 혹자는 공항에만 와도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나 역시도 그랬다. 점심에 비행기표를 끊고 저녁에 시드니로 훌쩍 떠나도 겁이 없던, 누구보다 여행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친구들 몰래 화장실로 숨어들어 눈물을 훔치는 나를 봤다. 지극히 비정상이었다.


그건 번아웃이었다. 사실 번아웃이 온 지는 1년이 넘었다. 연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미루는 사람처럼 억지로 버티다, 이제는 끝장을 내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나를 더 잃기 전에, 이제는 선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에 드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좀 아껴주고 싶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고 싶다'

'나를 돌보고 싶다'




퇴사 신호 2 : 기회가 왔다


그 메시지는 대만여행 내내 맴돌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퇴사하고 제주도나 강원도에서 그저 쉬고 싶은 마음이긴 한데, 그곳에 머물 돈은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니 회사를 그냥 다녀야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대만여행 셋째 날에 우연히 때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제주에 사는 지인의 SNS를 봤는데 유럽여행으로 장기간 집을 비운다며 아주 소액만 받고 대신 지낼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이건 기회였다. 대책 없이 퇴사해도 두렵지 않을 이유가 생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피신 아니 어쩌면 회피였을지도 모를 결정이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퇴사 신호 3 : 버릴 수 있는 용기



여건이 생겼으니, 이 퇴사의 결정이 충동이 아닌 이성적인 결정이 맞는지 한번 더 점검하기 위해 노트 하나를 펴고 하나씩 적으며 정리했다.


    퇴사를 해야 할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  

    퇴사한다면 얻는 것과 잃는 것  

    퇴사를 하지 않는다면 얻는 것과 잃는 것  

    퇴사한다면 감수해야 하는 것과 계속 다녀야 한다면 감수해야 하는 것   

    퇴사한다면 앞으로의 대략적인 계획


적어보면 지금 퇴사를 하는 게 여러모로 손해였다.  인정받던 커리어, 두둑한 연차휴가, 우수사원 포상.. 버티기만 한다면 반짝이는 것들을 더 많이 쥘 수 있다. 즉, 퇴사는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다.


그런데, 펜이 놓아지지가 않았다. 빛을 잃어가는 한 가지, 출국할 때 화장실에서 몰래 울던 내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어도 나를 잃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퇴사 신호 4 : 최악의 상황 생각하기


감정적, 충동적 퇴사는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퇴사 후 최악의 상황을 내가 감수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한번 더 무겁게 고민했다.


퇴사 후 최악의 상황

퇴사하지 않을 경우 최악의 상황


최악의 상황은 4년 전 취업준비를 하느라 생고생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4년 동안 나도 성장했다. 경력도 자랐다. 그러니 이제 내 배짱은 좀 다르지 않을까. 그리고 합리적인 선택이 항상 정답이 될 수는 없지 않나. 그렇게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시작하더라도 지금 멈춰야겠다. 그리고 제주도에 내려가야겠다. 나는 나를 찾아야겠다'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그-다-지 준비되지 않은 퇴사였다. 용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면서 조직장에게 퇴사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그려봤다. 이상하게 그때부터 기쁘고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긴 머리에서 단발로 자른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20시간 후.

 "조직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카페에서 뵐 수 있을까요?"


근로자의 날에 나는 근로자가 아니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해 떠난 여행이 시작됐다. 그날 마음의 무거운 짐을 비행기에 싣고, 내릴 때는 그 짐을 영영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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