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러나 Dec 01. 2023

제주 시골에 비가 오면 생기는 일

제주에 다시 내려온 건 뜨거운 8월이다. 습한 공기와 따가운 햇빛에 절여지느라 밖에 나가 걷는 게 형벌같았다. 그러나 누군가는 내게 '8월에 와서 운이 좋다'고 했다. 지난 7월 한 달 내내 비가 와서 맑은 날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말마따나 8월에 오길 다행이었다. 도시에서의 나는 정말이지 비를 미워하는 사람이라, 비와 잘 지내보려 온갖 유난을 다 떨어봤다. 비 오는 날에만 뿌리는 전용 향수를 사고, 비 내리는 컨셉의 스냅사진을 찍고, 비가 오는 날에만 듣는 전용 플레이리스트를 뒀다. 1년에 100일 넘게 비 오는 나라에 살면서, 비를 멈추게 하거나 영영 안 오게 할 재간이 없으니 비를 조금이라도 견뎌보겠다는 거다.   


비에 대해 나만의 위키트리를 작성한다면 온갖 부정적인 평가만 가득했을 거다. 그 여름, 제주에 가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때의 제주는 그 비마저 받아들이게 했다. 비는 약속이고, 무지개였다. 비는 '그 다음'을 기다리게 했다. 





제주 깡시골에 비가 오면, 길이 아주 엉망진창이 된다. 밭 사이에 난 조그만 길이 물에 잠기면 참 애를 먹게 된다. 좁은 길에서 후진해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가야 하는 불편도 겪게 한다. 초보운전에게는 아주 진땀 나게 하는 일이다. 비가 오면 불편한 건 도시나 시골이나 마찬가지지만, 다른 게 하나 있다. 여기 대정에서는 비가 오면 반드시 따라다니는 게 있다.  


바로 무지개다. 


동화책에만 있을 것 같고, 일 년에 어쩌다 한번 만날 것 같은 무지개가 이곳에서는 그렇게 자주 얼굴을 들이민다. 서울에는 없던 것인지, 높은 건물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늘이 9할쯤 되는 이곳에서는 무지개도 신이 나는지 크고 진하게 뜬다. 거의 하늘을 무대 삼는 수준이다. 그래서 비만 왔다 하면 이곳 사람들은 SNS에 너도나도 무지개를 자랑한다. 제주에 있는 동안 그러기를 몇 번 반복되니, 비가 오면 무지개가 뜨는 게 당연하고, 무지개가 뜨는 사진이 올라오면 비가 왔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운전하다가 비를 만났다. 와이퍼를 켜야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오늘도 무지개를 보겠네'였다. 생각을 달리하는 내가 기특하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다. 종이 울리면 먹이를 기다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비가 오면 무지개를 기다리는 것이. 어쩌면 무지개 때문에 이곳의 비까지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 비 온 뒤 뜨는 무지개는 그저 멋진 자연현상으로 끝나지 않았다. 퇴사하고 제주에 내려와 그저 인간구실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내게,  무지개는 '비가 전부가 아니야. 이 다음이 있어'라는 약속의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비가 오면 이 우중충한 하늘로 절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거,  하늘에 드리워진 오색의 띠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것.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이 역경 뒤에 반드시 성장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넘어질 때마다 반드시 교훈을 갖고 일어설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살다가 어려움이 와도 비 온 뒤 약속처럼 뜰 무지개를 생각하기로 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속담이 있었지만, 그때부턴 비 온 뒤 무지개가 뜬다는 말이 더 희망찼다.  어린아이에게 회복탄력성이라는 어려운 말을 설명해야 한다면, 대정의 무지개를 그려주고 싶었으니까. 


나는 어느 정도 튼튼해진 뒤에야 대정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토록 사랑하던 제주를 떠나야겠다는 용기에도 무지개의 지분이 어느 정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시 육지로 돌아온 지금엔, 대정의 무지개를 보고 싶어서,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비가 오면, 아니 비가 와야만 무지개를 볼 수 있으니까.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 마저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건 제주가 나에게 준 큰 선물이다. 

  

오늘도 제주도 꿈을 꿨다. 그 언제 다시 제주 시골에 가게 될까. 다시 가는 그날에는 꼭 비가 왔으면 좋겠다.  비 내린 후 오늘도 무지개를 보게 될, 제주도 그 사람들도 너무 그립다. 무지개만큼이나. 


작가의 이전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