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 직원의 속마음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
10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고 어느 정도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타인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 자신을 잃는 것이라는 사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 미움받는 것이 차라리 덜 위험하다... 그리고 만약 현실과 타협해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이라면 차라리 현실적응을 포기한 괴짜가 되는 것이 낫다.
나는 그런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는 '괴짜'가 되기로 결심했다..
진정성 없는 대화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폄하하며 쌓는 연대감을 거부했다. 당연히 굳이 불편한 식사나 회식 자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몇몇 동료들은 마음이 불편하지 않냐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물어보았지만, 내 생각에 불편한 마음도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온정이 남아있어야 가능한 감정이다. 이 조직 안에서 그런 인류애는 진작에 상실되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런 마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조직 안에서 괴짜가 누릴 수 있는 특혜는 생각보다 많다.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도 있고 굳이 비정상적 인간관계속에 감정소모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약간의 고독함'을 견딜 수 있는 마음의 체력만 준비된다면 누구나 가능하다.
은행은 팀이라는 구조 아래 각자도생 해야만 하는 감정소모가 많은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불특정 다수의 손님을 받는 랜덤게임 속에서 마음이 여리고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이 항상 이 눈치싸움의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편하면 옆 사람이 힘들어지는 게임... 전형적인 '시소게임'의 구조로 운영된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사람은 한가하고 이타적인 사람은 야근을 해야 한다. 게다가 평균 근속연수가 20년이 넘는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되다 보니 타성에 젖은 꼰대들이 정말 많다. 호봉만큼 일을 하는 게 아닌 보상심리로 일선에 앉아있으니 그들이 해야 할 나머지 일들은 옆에 있는 사람의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사람은 바뀌지 않은 조직의 숙명... 월급은 많이 가져가지만 정작 일은 하지 않는 선배들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후배는 없다. 반면 자기 것만 하고 동료의 일은 모른척하는 것이 똑똑한 거라고 믿는 젊은 직원들까지... 이쪽 세계에서 좋은 감정으로 일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의 수는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의 만남'외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에 은행원의 가장 중요한 복불복은 '옆에 앉아있는 동료가 누구 걸리냐'라고 생각한다.
'조직의 기준이 나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나라도 내 길을 만들어야 한다'
당시의 나에게는 안팎으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달려가면서가 아닌 잠시 멈춰서 나와 가족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나의 이민 도전기에 함께 올라타며 경력이 단절된 아내에게도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아이와도 좋은 추억을 더 많이 쌓을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예상은 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주변에서는 말을 아끼며 수근 되는 모습들이 보였고, 나를 아끼는 마음에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다시 생각해 보라 했다.
나는 살면서 큰 물의를 일으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큰 사고를 치면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나를 대하는지 경험해보지 못했는데 딱 이때의 분위기가 그런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본인이 은행을 20년 다니면서 남자가 육아휴직을 쓰는 것을 처음 본다며 혀를 차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나를 대놓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갈길을 가기로 했다'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제법 마음 근육이 단단해진 것 같다. 적어도 이제 남들의 시선 따위에 휘둘리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나는 육아휴직을 들어갔다.
비록 이 시간들의 기회비용으로 회사에서 이상한 사람이 됐을지언정 나에게는 너무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아이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내도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훌쩍 커버린 딸과 함께 내가 육아휴직 때 함께 했던 추억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비 오는 날이면 우비를 쓰고 개구리 소리를 들으려고 밖에 나갔던 일..
등원길에 눈에 보이는 꽃과 곤충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봄노래를 불렀던 일..
그네를 타는 법을 알려주며 처음 발구르기에 성공했던 순간까지..
네 살짜리가 뭘 기억하겠어라고 했던 모든 기억들을 딸아이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나에게는 모두 선물 같은 추억들이다.
'어린 시절은 아이와 부모사이의 작은 연결의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주어졌던 그때의 순간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은 흘러갔고 다시 복직을 하게 되었다.
내 생각에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라는 말은 아무래도 은행에서 유래된 말인 것 같다. 새로 만난 동료들은 '육아휴직을 쓰고 돌아온 남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시작부터 나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당시 나의 팀장은 이 지역에서 성격이 이상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오자마자 '네가 한번 버텨보나 보자'라는 느낌으로 모든 사무분장을 나에게 할당했다. 지점의 자동화기계, 서무담당 그리고 매달 기일관리와 사후관리까지 보통 2~3명이 나눠서 하는 부수업무를 모두 나에게 시켰다. 할 일이 없어도 본인보다 일찍 퇴근을 하면 다음날 심술을 부렸고 옆에 다른 팀원과는 귓속말로 대화를 했다.
"참.. 수준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구나.."
이때 이후로도 나는 다음지점에서도 이렇게 귓속말로 대화하는 직원을 한 차례 더 경험했다. 심지어 이 직원은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마저도 의도적으로 한 명을 배제하고 나눠주는 유치한 행동을 하며 감정을 소비시켰다. 이런 행동을 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본인들이 나보다 높은 직급에 있었다는 점과 나보다 업무를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쉽게 말해 갑질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런 사람들과 부딪혀가며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고서 여전히'은행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겪은 만큼만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돌고 돌아 나는 다시 원점에 서있다.
어쩌면 10년 전 원점보다 한두 발자국 뒤에 서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리한다고 생각해 왔다. 버티고 견뎌서 마지막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자라고...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최후의 승자는 마지막에 웃는 자가 아니라 자주 웃는 자다
나는 이제 자주 웃을 수만 있다면..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칠 것이다.
"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나는 더 이상 파랑새를 찾기 위해 집을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애당초 내 마음속에서 내가 낳고 내가 키워야만 보이는 존재였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깨달은 직장 안에서의 행복이란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닌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