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 그 첫번째
시작.
일단 이 단어를 무작정 써 버린 것만으로도 이 글은 시작한 셈이다. 언어가 가진 힘이란 얼마나 큰지, '시~작!'이라고 늘려 말하면 누구나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떤 관계를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정의했을 때 1에 해당하는 시기. 걸어온 길은 아무것도 없지만 앞을 보면 까마득히 길이 펼쳐져 있는 위치. 시간의 흐름을 손으로 잠깐 잡았다가 내가 놓고 싶을 때 손을 펼치는 것. 시작을 어떤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물은 이렇게나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말들뿐이다.
인간은 살면서 무수한 시작을 경험한다. 고작 이십 년 살아온 내 인생만 해도 양 손발을 모두 합쳐도 셀 수 없을 만큼의 시작이 있었다. 새로운 관계, 다짐, 공부, 습관... 하다못해 미루고 미룬 과제를 시작하는 것과 어제 하다 만 집 청소를 시작하는 것까지 합하면 우린 늘 무언가를 하려는 출발선에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읽히기 위한 글들을 쓰는 출발선에 서 있다. 이 카테고리에 채워갈 글들이 지금까지 블로그에 쓴 글들과 다른 점은 '읽히기 위해' 쓴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읽힐지, 타인이 이 글을 마주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할지 꽤 많은 고민을 거치고 탄생할 글이다. 분명한 목적성은 늘 무언가를 시작하는 당위성을 가져온다. 수필이라 하면 부끄럽고 일기라 하기엔 거창하다. 그래서 나는 이 카테고리의 이름을 '긴 호흡'으로 지었다.
글은 쓰는 사람의 창작물이며 곧 그 사람을 그대로 닮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길고 짧은 글을 여럿 써왔지만 내 글이라고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있냐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과연 앞으로 여기에 쓸 글들은 '내 글'이 될지, 그보다 나를 정말 닮았는지는 이걸 읽고 있는 당신들이 대답해주면 좋겠다. 글을 읽는 데에도 분명 호흡이 존재하는데, 내가 쓰는 글은 호흡이 길다. 담백하고 호흡이 짧은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일관되게 이어지는 내 글의 느낌이 백 퍼센트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런데도 글 쓰는 것을 사랑한다! 온점 가득한 글에 느낌표 하나 용감하게 찍고 싶을 만큼.
대학교에 와서 진정 열정적으로 들었던 수업이 무엇이었나 생각해보면 부끄럽지만 한 손의 손가락을 다 접지도 못한다. 그중 하나는 작년 2학기 때의 '창의적 글쓰기' 수업인데, 유일하게 과제를 하는 시간이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한 학기에 세 편의 글, 그것들을 수도 없이 고쳐서 제출해야 했던 기말 문집. 빡빡한 수업이었지만 기말 문집의 마지막 온점을 찍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 읽히려고 쓰는 글을 계속 써야겠다.'
교수님이 더는 과제를 내지 않는다면 내가 나에게 내야겠다, 라고. 그 뒤로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건... 거창한 시작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고 해두자. 이 말이 합리화는 아닌 것이, 준비 없이 시작하게 되는 일들은 대부분 금방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달리기를 하기 전 곧잘 듣던 '준비- 땅!' 하는 신호. 하물며 30초도 안 되는 뜀박질을 위해서도 '준비'라는 단어가 주어지는데,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준비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가. 내가 시작할 모든 일에 '준비-'를 읊는 시간은 분명 필요하다.
준비를 했다면, 그다음은 거창하게 시작할 차례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작은 그냥 시작일 뿐이다. 다만 절반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를 충전해놓고 최대한 거창하게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시작하면 절반까지 할 수 있을까? 그건 또 아니다. 작심삼일은 온 인류의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논리적 추론을 통해 정당하게 얻어낸 결론이다. 내 경우도, 아이패드에 정리 노트까지 만들어가며 힘차게 시작했던 영어 공부 앱을 지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심지어 들어가본 지 너무 오래돼서 상단바에 주기적인 알림까지 뜨지만 대차게 무시한다. 또 오랜 검색 끝에 다운받은 굿노트 가계부 속지는 한 페이지가 채 채워지지도 않았다. 지난 겨울,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를 걷겠다던 다짐은 잠깐의 장마철을 핑계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시작은 거창하다. 경험과 생각이란 인스타그램 스토리처럼 24시간 뒤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서, 잠깐의 열정이라도 내 안에 조금씩 쌓이고 있다고 믿는다. 시작을 1이라고 할 때, 수백 번 시작하면 100이 되고 수천 번 시작하면 1000이 되지 않을까. 내 시작이 1000만큼 쌓인 순간 1001번째 발자국을 내딛는다고 생각하면 왠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용감한 사람은 아니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나도 모르게 '보여주기식' 나를 만들어가지 않기 위함이고, 이 글이 겉멋 잔뜩 든 삼류 에세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함이며, 솔직함을 담기 위함이다. 용감한 사람이 아니어도 용감하게 살자는 글은 쓸 수 있지 않은가. 거창한 시작은 늘 용감하고, 솔직히 말해 거창하지 않은 시작도 용감하다.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출발선에서 발을 뗀 것이므로, 멈춰 있지 않은 인생은 누구랄 것 없이 박수받아 마땅한 것이다.
거창하게 말해보자면 일주일에 한 번씩 이 글 제목의 숫자를 올려 나가고 싶다. 사실 닮고 싶은 문체도 많고 쓰고 싶은 장르도 다양하지만 조금씩 정말 나를 닮은 글을 연습해보자는 다짐이다.
긴 시간이 지나 내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내 글이 사랑스럽기만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