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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수준의 심사평

by 미꾸라지

논문투고


대학에 근무하는 이상 가끔이라도 논문을 써야 한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논문을 한 편 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공을 들여야 하고, 그렇게 작성한 논문은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쓴 논문이 심사를 거쳐 게재됐을 땐 꽤 뿌듯하다. 그리고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도 많다.


이번에 논문을 하나 투고했다. 몇 달 동안 궁리하고 공부하여 작성한 논문이다. 원고를 좀 정리해서 5월에는 아오모리에서 서울까지 날아가 학회에 참석하여 발표도 하고, 피드백 내용을 참고해서 원고를 보완해서 논문을 투고했다. 이번 원고는 개인적으로 재밌는 주제이기도 하고 창의적인 내용이기도 하여 공을 많이 들여, 꼭 게재됐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래서 나름 꼼꼼하게 작성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렇게 공을 들여 작성하지만 논문 심사라는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보통 논문은 두세 명이 심사한 결과로 게재 여부가 결정된다. 내가 이번에 투고한 학회는 세 명의 심사를 받게 된다. 심사 결과는 게재가, 수정 후 게재, 게재 불가로 나뉜다. 그냥 게재해도 될 수준이면 '게재가', 수정이 필요하면 '수정 후 게재', 게재가 불가한 수준이면 '게재 불가'로 평가하게 된다. 게재 불과는 구체적인 이유가 명시돼야 한다. 세 명의 결과를 종합해서 게재 여부가 결정된다.


심사결과


논문을 투고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은근히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학회로부터 문자가 왔다. 메일을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메일을 열었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였다.


심사자의 의견이 절대적일 수는 없겠지만, 교수님께서 투고해주신 논문은 안타깝게도 '게재불가'로 판정되었습니다. 00학회 홈페이지에서 심사결과 및 심사평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 안타까운 결과였다. 내심 기대했는데 게재 불가라는 결과를 받고 보니 힘이 빠졌다. 그렇지만 논문심시라는 게 항상 그렇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게재가 안 될 수도 있다. 열심히 공을 들여 작성한 논문이지만 타당한 이유로 게재 불가 판정이 나오면 어쩔 수 없으며,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내 원고는 한 명이 게재 불가로 판정했다. 그 심사위원이 수정 후 게재만 해줬어도 수정해서 재심사를 받거나 할 수 있을 텐데, 간당간당하게 재심도 받을 수 없어 더 안타까웠다. 게재 불가의 이유가 뭘까, 어떤 결격 사유가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 학회 홈페이지에 로그인해서, 심사평을 확인해 봤다.


초등 수준의 심사결과


게재불가가 됐다는 사실에 실망이 컸지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건 게재불가라고 평가한 심사위원의 심사평이었다. 반쪽 정도의 심사 결과서였지만 결론적으로 1. 요지 파악이 쉽지 않고, 2. 특정 분야의 이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해당 학회에 부적합하다며 게재 불가로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 모두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요지 파악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에 2의 지적으로 이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요지 파악이 쉽지 않다는 모호한 평가는 초등학교 수준으로 보였다.


학회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에 나가 발표 원고를 읽어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보람이(가명)가 지나가다 뭐 하냐고 물어왔다. 발표할 원고를 읽어보고 있다고 하니, 자기가 한번 읽어봐도 되냐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원고를 건넸다. 보람이는 또래에 비해 문해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며, 읽기나 글쓰기는 곧잘 하는 편이다. 그래서 어려운 글도 읽어보려고 한다. 아빠 원고를 몇 줄 읽더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라며 원고를 내려놓았다. 보람이에겐 어려운 글이니 당연한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지 파악이 쉽지 않은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심사위원의 평가는 초등학교 5학년 보람이의 소감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의 재기


게재 불가를 준 심사위언이 초등학교 5학년 수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구체적으로 왜 요지 파악이 어려운지 그 이유를 제시했어야 한다. 특히 게재 불가라는 평가를 내리려면 그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게 평가자의 기본 자질이자 의무다. 나는 보통 논문 심사 결과에는 이의를 제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논문 결과는 이해하기 어려웠고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알고 싶어 논문 심사를 담당하는 편집위원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게재 불가 이유에 대해 이런이런 이유에서 납득할 수 없으니 재평가를 받거나 게재 불가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답이 왔다. 안타갑지만,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규정이 없어 재심사는 의뢰할 수 없고, 재심사를 받으려면 제삼자에게 의뢰해야 하는데, 이번 학회지 발간 일정이 정해져 있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사평에 대해 추가로 구체적인 이유를 요구해 볼 수는 있는데 심사위원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는 취지였다. 그래서 가능하면 다음 학회지에 다시 투고하자는 취지였다. 다른 안이 있으면 제안해 달라고 했다. 정중하게 메일을 보내왔지만 재심사도, 추가 설명 요구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였다. 납득하기 어려운 답이었다.


통화를 한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편집 위원장과 보이스톡으로 얘기를 나눴다. 메일과 비슷한 내용인데, 추가로 심사위원이' 내공'이 있는 분이니 함부로 심사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다음을 기약하자는 얘기였다. 그런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언짢은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편집 위원장이 심사위언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도 이상했다. 한 사람의 내공이란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고, 분야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사람이 특정 분야에 내공이 있으니 믿자는 식의 발언은 설득력이 낮아 보였다. 어떤 사람이 법을 어긴 것 같아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은 평소 그 사람의 됨됨이가 아니라 그의 행위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의 행위인 평가서 내용은 논하지 않고 그의 평소 됨됨이인 '내공'으로 애기하자는 자체가 비논리적이었다.


다음날 편집 위원장에게 다시 메일을 보냈다. 아무래도 추가 설명을 듣고 싶다고. 따질 게 많지만 다음 투고를 생각해서 '요지를 파악할 수 없는 이유'라도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고 했다. 원고의 요지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의 수를 모두 제시하며 어디에 해당하는지라도 알고 싶다고 했다. 내공이 대단한 분이라고 하니, 한 수 배워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수준 이하의 답변


하루 뒤 게재불가 판정을 한 심사위원의 추가 심사 의견을 담은 파일이 왔다. 수준 이하여서 놀랐다. 요지 파악이 어려운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아주 지엽적인 문제 두 가지를 지적해 왔다. 그것도 엉터리 지적이었다.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어 보였다. 편집 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이번 심사 결과는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계속 따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규칙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편집위원장의 미지근한 대응을 보니, 아무리 문제를 지적해도 게재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편집위원장에게 아래의 이메일을 보냈다.


000 교수님


수고 많으십니다.

교수님이 심사위원님이 내공이 있는 분이라는 말씀을 강조하셔,

한 수 배웠으면 하는 마음에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드렸는데, 바쁘셔서 그런지 솔직히 말씀드릴 수 없는 수준의 답변이 왔네요.


게재 불가 이유가 1. 요지 파악이 쉽지 않아서, 2. 00이론 중심이어서였는데,

요지 파악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렸는데, 이번엔 0000에 대한 두 가지 지엽적인 지적이 왔습니다. 이는 1과 2를 다 부정하는 답변이란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두 가지 지적을 보고 제 원고 '2장에 대한 요지'도 제대로 이해를 못 했구나 하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구체적으로 설명드릴 수 있고 해명할 수 있지만 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논문이 다 게재되어야 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게재 불가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잘 아시겠지만 논문 한 편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까.

논문의 요지 파악이 어려워서라는 모호한 심사평으로 그런 노력을 망치는 일은 없어지길 바랍니다.




여전히 남는 의문


나는 게재 불가의 진짜 이유가 뭔지 알고 싶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직접 물어볼 수도 없어, 그가 작성한 평가서와 추가로 보내온 답변을 토대로 추론해 볼 수밖에 없다. 정말 게재 불가한 수준이라서 그런 판단을 했을 수도 있고, 잘 이해가 안 가 그런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전자라면 그 근거를 제시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후자라면 게재 불가가 아니라, 수정을 요구하거나 보충 설명을 요구했어야 한다.


근데 왜 게재 불가를 내렸을까? 두 가지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여기서 밝히고 싶지 않고, 두 번째 이유는 평가자의 익명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기 이름을 걸고 이런 수준 이하의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나와 마주 앉아 당신 논문은 요지 파악이 쉽지 않으니 게재 불가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보통 논문 심사는 익명이다. 이는 아마 공정한 심사를 위해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결과를 보면 오히려 심사자의 이름을 밝히는 게 공정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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