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후반전 시작 2023.9.23.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 난 대학 입시에서 약대에 선지원했고후보 2번으로 아쉽게 떨어졌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의 하나라고 생각되리만치 그 이후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칠 즈음 난 논문 쓰는 일과 연구 제안서 쓰는 일이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걸 깨닫고는 그걸 평생 하면서 살 수는 없겠다고 결론내고 딱히 포닥 자리도 구하지 않고 졸업을 했다. 지도 교수는 열정과 야망이 없어 보이는 외국인 학생을 연구원 월급 주며 졸업시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을 터라 졸업하면 연구실에 안 나와도 된다고 했다. 뭘 할지 모르고 물고기 뱃속 같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상황이어서 앞으로 뭘 하면 좋을까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경도 읽고 10개월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분이 많지 않고 안면 있는 한 교회 집사님이 전화를 나에게 먼저 주셨고 회사에 면접 오라고 하셨다. 그 집사님이 월급 사장님이셨던 그 회사는 본사가 한국이고 미주 법인을 설립한 지 얼마 안 되는, 인원이 대여섯 되는 작은 회사였다. 남편 포닥 월급 만으로는 통장 잔고가 늘 간당했고 내가 직장 구하는데 적극적으로 뛰는 편도 아니어서 딱히 다른 대안이 있지도 않았기에, 고민 없이 감사히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 미주 법인에서 7년, 본사에서 또 4년, 11년 넘게 근무하다가 그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낙천 안정형이라 지내면서 다른 회사로 옮기는 상상 한 번도 안 하고 회사가 나, 내가 회사 그런 마인드였는데 어느 날 회사가 나를 졸업시켰다.
그해 9개월쯤 지나서, 운 좋게 동종 업계 외국계 회사로 들어갔다. 그것도 그전 회사에서 뵌 적 있는 대표님이 먼저 지원해 보라고 말씀해 주셔서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입사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한번 다녀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업계에서는 명성이 있어서 입사할 때 정말 기뻐했는데 막상 회사 문화가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첫 일 년 좌충우돌 적응기 이후에는 안정을 찾아 5년 정도 다녔고 코로나 기간 중에 늦은 나이에 임신해서 건강하고 귀여운 아이도 낳았다. 입사한 지 5년이 다 될 무렵, 그러니까 이번 달에 이번에도 회사가 나를 졸업시켰다. 퇴사가 내 결정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고 당황하긴 했지만, 정신을 가다듬어보니 해방감도 있었고 그 간에 날 품어준 회사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에 재택이 많았던 터라 임신기간, 두 돌 이후까지 아이 가까이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감사했다. 큰 회사 특유의 안정된 시스템 덕분에 자잘한 고충 없이 잘 지냈었다. 이번에도 ’ 여기서 그만, 이젠 되었다 ‘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닐까 싶어 내심 인생의 다음 단계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 퇴사할 때 조금 다른 점은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회사)을 위해 뛰었다면 이제는 온전히 내 꿈을 위해 시간을 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5년 전에 누가 장래 희망이 뭔지, 회사를 차릴 생각이 있냐고 물었을 때만 해도 회사 창업이라면 손사래를 쳤고 이인자 정도 어떤가 했었다. 아무래도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가 무겁고 재무 관리, 사람 관리도 자신 없기 때문이었을 거다. 사람을 대하는 거 어려운 거는 지금도 같지만, 지금 조금 달라진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에너지 안에서 소진되고 싶지 않다고 하는 마음이다.
블로그를 만들어 내 분야 관련 글을 써보기도 하고 사업계획서를 적기 시작해서 창업 준비 해 본 사람과 상의도 해 보았다. 회사 차리는 거 도와준다는 법무사에도 연락해 두었다.
끌어당김이라는 게 있다는데 그것인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 만나야 할 사람을 우연히 알게되어 만나게 되는 기회도 생기고 우주가 나의 조용하고 잔잔한 나의 정신적 실험과 새로운 시작을 돕고 있는 듯, 축복을 받은 듯 한 기분이 든다. 스포츠는 잘 안 보지만 이것이 스포츠 경기라면 흔히 말하는 인생의 후반전이 한가닥의 시원한 바람과 함께 시작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