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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ㅠㄴ Jun 04. 2022

[백수일지] 삼개월의 직장인 체험이 끝났다 이 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올해 2월에 졸업을 했으며(드디어!), 3월에 출판사 마케터로 급하게 취업을 해버리는 바람에 삼 개월 동안 직장인 체험을 했고, 6월 1일을 마지막으로 퇴사를 하게 된 쥰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하는 거냐면, 글쎄.. 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퇴사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을 때도, 퇴사를 했다고 말 한 이후에도 가장 곤혹스러운 반응은 '왜?'였다. 분명한 이유가 없지는 않은데 그걸 또 구구절절 설명하자니 그냥 퇴사하고 싶은데 이유 만들어내서 말 길게 하는 사람이 된 거 같고.. 근데 나는 정말로 중요하단 말이야 그런 구구절절한 것들이. 그런데 나도 그런 구구절절한 것들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해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속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해서 했고, 그래서 뭘 해야 할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우선 퇴사를 했다. 누군가가 내게 꼬리 질문을 하지 않을 테니 퇴사 사유에 대해 한 문장으로 말해도 된다고 말해준다면, 내 퇴사 사유는 이렇다. 

"생각을 하고 싶어서"

 어, 어, 더 묻지 않기로 했지? 묻지 마. 

 회사에 다닐 때 매일 업무일지를 썼다. 주간일지도 아니고 일일 업무일지라니. (웩) 그걸 쓰다 보면 업무 일지에 한 줄이라도 더 적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일이 없어도 만들어 내곤 했다. 문득 그게 생각이 났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을 시간이 시작되었고, 그러니 나의 육월을 하루도 서투르게 흘려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업무일지 대신 백수일지를 써볼까 한다. 어감이 마음에 안 들지만, 많은 사람들이 감시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재미없고 관심을 끌 만한 키워드로 가져왔다. 가보자고.....



 

환희의 퇴원 축하 케이크를 가지러 간 홍대 입구역 앞에 웬 거울이 있길래 야밤에 뭔 거울이여 하고 갔다. 이런 게 홍대 감성인가? 글씨체도 그렇고 저 스마일 스티커도 그렇고 뭔가 노티드 도넛이 생각나는 디자인..이었는데 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날이 바로 내가 퇴사한 날! 삼 개월 일하고 받는 송별회 정말 기분 오묘했다. 이래서 마지막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고 하는 걸까? 여러 스트레스가 있었고, 사람에 대한 정을 전혀 주지 않았는데도 괜히 훈훈한 분위기에서 헤어지니 아쉬운 것처럼 느껴지는.. 그렇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울렁거리긴 했다. 그런데 이 울렁거림이 환희의 퇴원 때문인지, 나의 퇴사 때문인지, 막막함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까?



환희의 퇴원 파티를 하고 효주와 환희와 잠을 잤는데, 성장기 이래로 꾼 적 없던 아주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다. 그런데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꿈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떨어지는 것보다, 나를 밀친 사람에 대한 공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이미 다 지나간 시간이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가끔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억이 있지. 


 잠을 자다가 깼는데 환희와 효주가 따뜻한 침대에서 마저 자라고 했다. 내가 자는 동안 환희와 효주는 밥을 먹고 보드게임도 했다. 사실 깊게 자지는 못 해서, 친구들이 노는 소리가 들렸고 일어나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는데 몸이 너무 무거웠다. 계속해서 쳐졌고, 친구들은 그런 나한데 서운해하지 않았고, 나는 또 그런 친구들이 고맙고.... 그러니까 건강해져야지. 건강해져서 열심히 놀아야지!




집에 와서 방을 조금 치우고, 환희가 준 꽃을 화병에 넣었다. 그리고 빨래를 두 번 돌리고, 널고, 방바닥을 닦았다. 머리카락을 좀 치우려고 돌돌이를 찾았는데 마침 돌돌이를 리필해야 하는 때였고, 그래서 리필용 돌돌이를 꺼냈는데 세상에.. 리필용 돌돌이 사이즈가 턱도 없이 작았다. 그러니까 나는 왜 리필용 돌돌이 사이즈를 이딴 걸로 산 걸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할랑 말랑 하다가 그냥 한숨 한번 쉬고 다시 서랍에 쑤셔 넣었다. 그거 생각해서 뭐해, 내가 멍청이라는 결론밖에 더 나와? 


 그래도 방바닥을 치우긴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물티슈로 바닥을 다 닦았다. 방이 넓지 않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땀이 좀 나긴 했지만...



본가에 갔을 때 엄마가 준 향초다. 받을 땐 이게 뭐냐고 툴툴거렸는데, 문득 보여서 불을 켜 두고 계속 쳐다봤다. 녹아내리는 모습은 좀 더 기괴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도 뭐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 불이 꺼질 때까지 보고 있으면 갑갑한 게 좀 해결이 될까 하는 미신적인 마음으로 계속 바라보고 있었는데, 도저히 꺼질 생각을 안 해서 그냥 후 불고 끄고 잤다. 효주가 그랬는데, 불을 후 불어야지 이루어 진댔다. 효주의 말은 믿을 만하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서, 오늘부터 시작하는 요가 수업에 갔다. 오전 11시 수업인데 충분히 잠을 잤음에도 일어나기 힘들었다. 잠이 와서 일어나기 힘들기보단, 몸이 자꾸 가라앉아서 일어나기가 힘들다. 체력적으로 바닥나 있음이 느껴진다. 그럴수록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아는데, 아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다르잖아? 그래도 일어났다. 한 시간의 수업 동안 지쳤고, 눈앞에 보이는 구내식당에서 식권을 끊었다. 밥은 뭐.. 그냥 그랬다. 대단히 맛있지도, 대단히 맛없지도 않은 구내식당 맛이었다. 그래도 종종 수업 마치고 밥을 여기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설거지하기 싫어.


 오후에 스타벅스에 효주랑 환희랑 가기로 했는데 몸이 너무 처져서 누워있었다. 십 분이라도 자고 싶었는데 잠이 오는 건 아니어서 그냥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환희가 집에 가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몸이 쳐지는 나는 자꾸 친구들을 기다리게 한다. 건강해져야지. 그래야 놀 수 있다. 나는 노는 게 좋아. 친구들이 좋아. 아, 아무튼. 그러다가 갑자기 환희가 라멘이 먹고 싶다고 했고, 이번엔 바로 나가서 효주화니와 라멘을 먹으러 갔다. 음.. 맛없었다. 앞에서 내가 구내식당 밥이 그저 그렇다고 했었나 혹시? 정정한다. 라멘에 비하면 존맛탱임. 괜히 사람들이 줄 서서 식권 끊어 먹는 게 아니라고. 아, 감자고로케는 맛있었다. 어디 제품인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밥을 먹고 효주의 집으로 같이 갔다. 어차피 우리 집 바로 아래층이기도 하고.. 집에 가면 또 침대에 누워버릴 것 같아 가고 싶지 않았다. 효주의 집에서도 역시 쳐져서 의자에 앉아 있다가 바닥에 누워있었는데(그 와중에 침대에는 절대 못 눕게 할 것 같았다.) 효주가 벽에 서 있게 했다. 몸을 깨우라고... 정말 귀찮고 피곤해서 눈을 반만 뜨고 시키는 것도 대충대충(제자리걸음 시켰다) 하고 입에 물려주는 커피도 인상 팍 찡그리고 빨아 마셨는데 신기하게 그러다 보니 정말로 정신이 들었다. 효주는 그렇게 내 정신을 깨워두고 자기는 잤다. 진짜 웃긴 사람이야~ 


 자고 일어난 효주는 알바를 하러 갔고, 나는 내 방으로 왔다. 설거지를 하고, 양파를 모조리 까서 소분했다. 쌀과 찹쌀을 적당히 섞어서 밥도 하고,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뒀다. 그리고 닭갈비를 볶아 저녁으로 먹었다.


 언제부턴지 해야지, 해야지 하고 다짐만 하던 것들을 하나씩 해버리니 뿌듯했다. 고작 양파 썰기 일수도 있지만, 이게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다가 썩힌 양파가 몇 개인데? 밥하기도 그래. 친구가 선물해준 찹쌀 이거 받은 지 한 달이 넘었다. 이걸 이제야 써보다니. 사실 이제 미룰 수 있는 핑계도 없다. 설거지를 하다 보니 고무장갑을 새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이 자꾸 들어온다. 또, 카레가루도 사야 하고... 이제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하니 장도 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월에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정말 많은데, 그중에 제일 첫 번째는 건강해지기로 하자.



서랍도 정리했다. 커피머신을 선물 받았는데 잘 쓸까 싶지만,, 있으니까 잘 써봐야지. 잘해봐야지. 잘해봐야지. 잘해봐야지. 잘 살아봐야지.


 책상도 정리했다. 나 정말 정말 개판으로 살았었는데, 방의 부분 부분을 정리할수록 뭔가 해낸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좋다. 정리하는 김에 벽에 사진들도 새로 추가해서 붙이고, 액자의 사진도 갈아 끼웠다. 내가 잘 살고 싶게 만들어 주는 용기들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증거들로 채워진 내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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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오늘 한 것


             요가수업           

             양파 소분 / 밥 짓고 소분           

             6월 계획 및 주간 계획 세우기           

             페스츄리 도서관 기획팀 회의           

             환희랑 효주랑 만남           

             방 치우기           

             닭갈비 구워먹고 설거지           

             겨울옷 집어넣음           


오늘 못 한 것

             빨래 개기           

             옷장 정리           

             찬장 정리           

             줄넘기



어떻게 할 것인지?

             내일 조지게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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