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 채우기
특수학교에서의 3년은 내게 할 수 있다는 무궁무진한 가능성도 일깨워주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저시력이었던 것은 물론이고 선천적으로 남들과는 다른 뼈의 성장을 보였다.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잡고 병원을 다녀봤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지금은 성장 중에 있는 아이이니 뼈의 성장이 다 멈추게 되는 어른이 되면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남들과는 다른 한쪽 팔과 손을 바라보며 어찌나 손꼽아 어른이 되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훗날 성인이 되어 찾아간 병원에서는 팔과 손의 관절의 연골이 다 닳고 달아 없어지는 병인 연골연화증이 심해져 퇴행성 관절염이 온 것이라고 했고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 수술할 날만 기다렸는데 의사의 입에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너무 서럽고 절망적이었다. 몇 년 후, 내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증상을 모아 보니 결국 이 모든 것은 희귀 난치병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내가 학생일 때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쩌면 시력보다 양쪽 팔의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차이나고 오른쪽 팔꿈치부터 손가락까지 엄지손가락을 제외하고 다 변형되어 휘어지고 골종양이 가득해 울퉁불퉁한 뼈로 인해 더 제한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변형된 팔로 인해 짧은 소매로 된 옷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날씨가 점점 더워져 학생들이 하복을 입을 때도 나는 반에서 가장 늦게까지 춘추복을 입다가 더 이상 춘추복을 입을 수 없을 때가 되면 하복 위에 늘 긴팔카디건을 걸치고 다녔다. 그저 평범하게 계절에 맞게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 이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특수학교에 와보니 나처럼 팔이 불편한 학생들도 있었다. 나와 같은 학년엔 두 명이 있었다. 시각장애 특수학교이지만 미숙아로 태어나거나 뇌병변 장애가 있는 경우 시각뿐만 아니라 마비로 인해 몸이 불편한 특징이 있다.
두 명 모두 편마비로 인해 한쪽 팔을 사용할 수 없었다. 나는 일반학교에 다니면서 마비가 있는 친구는 딱 한 명 본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인데 소아마비로 인해 오른쪽 팔을 사용할 수 없었던 친구였다. 그 친구와는 팔이 불편하다는 공통점도 있었고 집도 같은 방향이라 제법 친하게 지냈었다. 그 친구는 왼쪽 팔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독립심이 강했고 공부도 전교권에 들 정도로 잘했다. 그리고 특히 미술을 정말 잘하던 친구였다. 그 친구와는 중학교 2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었었다. 우리 둘은 여전히 팔이 불편했고 그 친구도 나도 여름이 오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런데 그 해 봄, 나는 팔이 부러져 수술을 했고 팔 깁스와 어깨에 팔을 걸어 지지할 수 있는 팔보호지지대를 착용했다. 이 팔보호지지대는 내 변형된 아래팔을 쏙 가릴 수 있는 구조였고 팔 깁스를 풀고도 어깨가 처질 수 있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한동안 착용할 것을 권했다. 그런데 깁스를 풀 때쯤은 점점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이걸 핑계 삼아 그 해 여름은 팔보호지지대로 팔을 가리고 다녔다. 팔을 계속 구부리고 있어야 해서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 더 큰 해방감을 느꼈다. 그런데 소아마비친구도 그 해 여름 나와 같이 팔보호지지대로 팔을 가리고 다녔다. 문제는 우리가 같은 반이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것을 두 명이나 하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슷한 입장에서 그 친구에게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팔을 가릴 수 있었던 팔보호지지대가 하나의 피난처였을 것이다. 괜히 어린 시절 더 주목받고 싶지 않아 인색해졌던 마음에 미안한 감정이 깃든다.
나는 겉모습은 물론이고 변형된 뼈로 인해 팔과 손을 움직이는 데도 제한이 있어 주먹조차 쥘 수 없다. 또 무엇보다 팔이나 손을 무리하게 사용하면 통증도 있었고 근력도 왼쪽 팔에 비해 2배가량 약했다. 그래서 나는 팔에 대한 콤플렉스가 굉장히 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조금 불편해도 두 팔과 두 손을 다 사용할 수 있었고 편마비로 인해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마비가 있는 다른 쪽 팔 소매에 단추를 잠그는 것이나 겉옷을 입을 때 팔을 넣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칫솔에 치약 짜기 등. 마비가 있던 학생 중 한 명은 2년 동안 같은 반이 되어 자연스럽게 같이 다니며 도움이 필요할 때 작게나마 도움을 줬을 뿐인데 내가 특수학교를 졸업할 때 그 학생의 어머니가 특별히 학교 쪽에 부탁을 하여 내게 장학증서와 장학금도 주셨다. 나는 그 장학금을 받고 어머님이 생각해 주시는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기도 했지만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내가 2년 동안 온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그 학생과 함께 했는지 물어보면 “아니요.”이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시간은 깨끗한 마음으로 함께 했지만 고3 대학교 원서 준비를 할 때쯤은 여유도 없고 1분 1초가 아쉬워 그 친구의 조금 느린 행동에 인내심이 바닥나고 조바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특수교육과를 희망했던 내가 진정 특수교사로서의 자질이 있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늘 도움만 받던 내가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좋았고 감사했다. 책을 좋아해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인 친구는 중도에 시각장애인이 되어 시력을 모두 잃어 맹이 되었다. 더 이상 눈으로 글씨를 볼 수 없어 점자를 익혀 점자로 된 책이나 파일은 읽을 수 있었지만 그 친구가 좋아하던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구할 수가 없어 그 친구는 자신이 보지도 못하는 종이책을 직접 구매해 내게 읽어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평소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라서 나는 방과 후에 그 친구와 학교에 남아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낭독했다. 나도 미약한 시력을 보완할 수 있는 독서확대기를 통해 글씨를 읽을 수 있었지만 글자 하나하나를 보고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어딘가를 이동할 때 맹학생들을 인도하는 안내보행자의 역할도 할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 안내 보행법은 안내하는 사람이 시각장애인 보다 반 보 앞에 서서 안내할 팔꿈치를 내밀면 시각장애인이 안내인의 팔꿈치 위를 살짝 잡아 함께 이동한다. 나도 잘 보이는 편은 아니었지만 주변부 시야가 남아 있어 부딪히지 않고 잘 다니는 편이라 안내 보행을 잘했다.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컵 닦기 근로 봉사도 3년 내내 할 수 있었고, 경로당이나 한센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계시는 소록도에 정기적으로 찾아가 안마봉사 및 말벗, 청소 봉사도 할 수 있었다. 참 신기하게도 시각장애인이 배우는 안마는 엄지손가락으로 하는 수기가 많아 엄지손가락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하늘이 안마는 할 수 있도록 유일하게 엄지손가락에는 뼈의 변형이 없이 멀쩡하게 만들어줬나 생각도 든다. 그리고 신체구조상 올바른 자세로 바이올린을 할 수는 없지만 학교에서 특별 교육으로 배우는 바이올린도 어정쩡한 자세지만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통해 나는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고 조금씩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시선도 가질 수 있었다. 내게 주어진 것에 소중함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쁨, 나눌 수 있는 감사함은 나를 점점 긍정으로 채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