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됐다.”
특수학교라는 곳을 처음 알려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도 하셨었다.
내게 고난과 시련이 많은 것은 그만큼 그것들을 견뎌내고 담아낼 수 있을 만큼 내가 큰 그릇이기 때문이라고,
이 말은 곧 나를 깨질듯하게 만드는 모진 말이기도 했고 나를 더 굳건하고 단단해지게 만드는 말이 되기도 했다.
다이아몬드와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은 모두 같은 원소인 탄소로 이루어져있다고 한다. 즉, 동일한 물리적 상태에 있지만 원자의 배열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고 흑연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도 어느 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저시력이었기 때문에 잘 보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기에 내게 있어 본다는 것은 늘 남들에게 뒤처지고 소외되었으며 나의 무능력함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늘 엄청난 열등감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특수학교에 와서 보조공학기기인 독서확대기를 접하고 나서 내게 본다는 것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창이 되었으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얼마나 재밌는 일인지, 성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해주는 것이 되었다.
탁상용 독서확대기는 컴퓨터 같은 화면을 통해 실제 사물이나 책에 있는 글씨를 무려 100배가량 확대해서 볼 수 있는 기기였다. 기기마다 성능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적인 기능으로는 확대, 글자색과 배경색을 변경하여 각자에게 적절한 대비로 볼 수 있게 하는 기능, 밝은 조명 혹은 어두운 조명 등 각자의 시각 특성에 맞게 빛의 조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 시야가 좁아 읽는 줄을 잘 놓치는 경우 화면에 줄이나 가림막이 표시되는 기능 등등 일반적인 크기의 글자를 보기 어려운 시각 특성을 지닌 저시력 시각장애인에게 아주 유용한 기능이 가득 담긴 기기였다.
나는 처음 이 기기를 접하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한을 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독서 확대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봐보는 손의 지문, 피부의 모공에서부터 돈에 그려진 세종대왕님의 얼굴 등 신세계가 가득했다. 졸업앨범을 보며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던 친구들의 얼굴도 자세히 볼 수 있었고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들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심지어 몹쓸 자존심으로 일반학교 때 수십 통의 정성스러운 편지를 써줬던 남자친구에게 눈이 나빠 편지를 읽을 수 없다고 용기 내 말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과 입을 통해 전달받아야 했던 편지 내용도 이제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지 않아도 내가 원할 때 모조리 볼 수 있었다.
정말 너무 행복했다. 무엇인가를 마음껏 보고 시각적인 정보를 가득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물론 미약한 시력을 단순 수치로 100배 보완한다고 해도 그만한 시기능이 될 순 없고 보조공학기기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도 요구된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시각장애인이 단계를 넘어가지 못하고 기기 사용을 포기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보조공학기기를 제공받았을 경우, 또 기기 활용의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을 경우 보조공학기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불편하다는 불평을 늘어놓기도 일쑤다.
나도 처음에 독서확대기를 사용함에 있어 기기에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무엇보다 눈이 빠질 듯이 너무 아팠다. 그렇지만 필요에 의해서 나는 계속해서 보조공학기기를 사용했고 지금은 몇 시간을 넘게 사용해도 끄떡없을 정도로 눈의 통증도 없어졌다. 그런데 독서확대기는 가격이 200~400만 원 정도로 상당히 고가인 편이었고 내가 주로 사용한 기종은 무게 18kg, 화면크기 24인치로 무지막지한 크기와 무게로 제한된 장소와 큰 책상이 필요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고등학교 3년 내내 거의 학교에 살다시피 생활해야 했다. 등교를 할 땐 학교 교문이 열리는 새벽 6시~6시 30분쯤 제일 먼저 학교에 와서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9~10시까지 학교에 있다가 나왔다. 주말에는 집에 있어도 보조공학기기가 없어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주말이건 공휴일이건 쉬는 날에도 학교에 찾아가 공부를 했다. 그땐 어디서 그런 열정이 샘솟았는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아침도 혼자서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다녔다.
특수학교에서의 3년을 돌아보면 정말 하루하루가 치열했다. 어릴 때부터 성공의 경험보다 늘 남들보다 뒤처지고 못하는 게 많았던 나는 미래를 꿈꿀 때도 소망보다는 불안이라는 요소가 나를 작동시키는 연료였다. 기초도 없고 공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나는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그냥 무작정 많이 읽어 외우는 전략을 사용하여 공부를 했다. 그러니 내게 늘 시간은 부족했고 나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불안감과 열등감에 똘똘 뭉쳐있던 나의 비교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과거의 나로 향해있었다. 그 이유는 자기 객관화를 통해 바라본 나 자신의 보완할 점을 채워나가는 성장의 기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는 무조건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야 했다. 왜냐하면 우리 학년은 상위권 대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많았기에 등급 쟁탈전이 더 치열했기 때문에 1문제만 틀려도 타격이 컸다. 훗날 그 학생들 중에 변호사가 된 친구도 있으니 결코 만만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와 경쟁할 것도 없이 그냥 나 자신과의 경쟁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했고 늘 목표는 무조건 100점이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그때 당시 교장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용 됐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학교에서는 무능력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던 내가 점점 더 할 수 있는 게 많아지고 밝아지고 있음을 나도 느꼈다.
교사가 되어 학생일 때의 기억과 추억은 점점 흐려져가지만 그때는 더 깊이 있게 알지 못했던 감정과 느낌은 조금 더 그 윤곽이 선명해지는 듯하다.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는 학생 수도 고작 5명 남짓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늘 밤늦게까지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해주시고 맛있는 간식도 챙겨주셨던 감사한 수많은 선생님들, 아무도 없는 텅 빈 주말의 학교에 늘 불쑥불쑥 찾아가 공부를 하고 갔던 학생이 귀찮고 신경 쓰였을 법도 한데 교실에서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개방해 주시고 관리해 주신 학교 지킴이 선생님,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복도까지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책 읽는 소리에 놀라 교실에 와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격려해 주시고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으면 직접 맛있는 왕만두를 사다가 간식으로 건네주고 가셨던 교장선생님
주위를 둘러보면 내겐 넘치도록 고맙고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불안한 미래와 불안정한 심리, 정서로 인해 더 많은 것을 둘러보지 못했지만 선의의 경쟁으로 나를 더욱 성장할 수 있게 한 것도 결국엔 더욱 깊은 감사함으로 남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노력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를 믿고 우직하고 끈기 있게 나아가는 법도 배웠으니까 말이다. 노력과 과정에 상응하는 결과도 물론 중요하지만 특수학교를 다니며 나는 순간순간 나를 더 성장시키고 따스하고 포근하게 만들어주었던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과 마음이 더 귀함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