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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푸치 Apr 19. 2024

내신 9등급 꼴찌, 사범대에 가다

내게 대학은 꿈꿀 수 조차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솔직히 나는 안마사가 되기 위해 시각장애 특수학교에 갔다. 조금 불편한 손과 팔이지만 시각장애인이기에 할 수 있는 직업은 안마사라고 생각했다. 열약한 신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직업을 선택할 때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안마사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함이 싫었다. 미래, 아니 내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 기술을 배워야 했다.


나는 꿈이 많은 아이였다. 빵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오랫동안 성우를 꿈꾸기도 했다. 엄마의 소망을 가득 담은 모델도 되고 싶었고 달리기 선수도 되고 싶었다. 속기사도 상담사도 작가도 되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 다른 방법과 방향으로 그 꿈들을 충분히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긍정보다는 부정이,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없는 것이, 자유보다는 제약이 더 많다고 생각한 나는 평범함에 초점 맞춰진 세상과 현실에 수없이 무너졌다.




그렇게 벼랑 끝에서 마주한 곳이 특수학교였다. 그곳에서 거의 처음이다시피 내 눈을 통해 글자를 보며 공부할 수 있었다. 글자 속에는 수많은 정보와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것들을 머리와 마음에도 담았다. 점점 더 내 머리와 마음이 오롯이 내 주관을 가지고 채워졌다. 이 시기에 나는 독서확대기를 통해 읽고 보는 것도 많이 했지만 쓰는 것도 많이 했다. 옛날에는 굵고 진한 펜을 이용해 크게 적지 않으면 내가 쓴 글씨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보조공학기기를 접하고 나서 나는 다이어리 쓰기에 푹 빠졌고 기록도 일기도 열심히 썼다.


그 행위는 즉,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과 속도를 정해주었다. 서른 살이 넘은 지금, 고등학생 시절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에 목표를 두고 우직하게 나아간 과거의 나에게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공부란 것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첫 시험을 봤다.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중간고사가 뭔지 기말고사가 뭔지 용어조차 생소했다. 처음으로 수학에서 나오는 교집합의 기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되고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작은 각주 글씨를 볼 수 있게 되고 영어 알파벳도 영어 공책에 줄 맞춰 쓸 수 있게 된 나는 무식해도 정말 무식했고 기초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본시험에서 나는 꽤나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았다. 공부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름 과목마다 50점을 넘은 것이다. 일반학교에서 늘 평균이 20~30점이었고 정말 잘 받아봐야 50점을 갓 넘었던 내게 엄청난 점수였다. 시험 점수를 보고 처음으로 성적에 욕심이 생겼다. 과거의 나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다이어리에 나만의 목표를 정해두고 조금 더 조금 더 위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고2 때는 무조건 100점이 목표가 되었다. 성장의 기쁨도 기쁨이지만 고3 내내 나 자신을 어지간히 괴롭혔다. 지금도 나 자신에게 향하는 잣대는 엄격하게 짝이 없지만 조금씩 유연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공부란 것을 할 수 있게 되자 안마사에 국한되어 있던 직업의 경로가 바뀌었다. 그렇지만 대학을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해도 내가 그릴 수 있는 미래의 범위는 좁았다.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 봐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신체 조건의 한계와 사회 제도적인 부분 등을 넘기란 어려웠다. 그리고 나의 흥미와 적성도 중요하지 않은가. 아마 꿈을 정하는 일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결코 쉽지 만은 않은 일인 듯하다.


진로를 생각하며 고민이 정말 많았다. 과연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난 어떤 것에 흥미가 있고 내 적성에는 뭐가 잘 맞을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내가 노력해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영역은 무엇이고 어려운 점은 무엇일까.


그렇게 여러 관점에서 현실적인 부분도 고려해 최종적으로 추려진 곳이 사회복지과와 특수교육과였다. 고2 때까지는 사회복지사를 꿈꿨다. 봉사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교사라는 직업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결정한 것이 더 컸다. 그래서 고3 때는 용기를 내 과감히 대학 수시 원서 6곳 모두 특수교육과에 지원했다.




지원을 했을 때도 여전히 두려웠다. 장애와 봉사, 조력 등 이런 쪽을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뒤에 붙은 “교육”을 생각하면 정말 막막하고 부담감이 컸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에 관심도 없고 소질도 없다. 더군다나 나는 과거 나머지 공부를 매일 밥 먹듯 하고 내신 9등급에 꼴찌까지 했던 사람이 아닌가. 특수학교에 와서 쌓아 올린 성적은 높았지만 나는 기초가 하나도 없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내가 선생님을 꿈꾼다는 것은 굉장히 모순적이었다. 사실 선생님이라는 직업보다 그저 장애인들이 좋았다.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특히 중도에 실명하여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길을 밝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선생님이 되긴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 8년 차 교직생활을 하고 있는 현재도 선생님이라는 이름과 교육이라는 무게는 내게 너무나도 벅차고 무겁다. 하지만 학생들을 보면 또 마음이 동한다.




느리더라도 서툴더라도 더디더라도 “괜찮다 괜찮다” 무한한 격려를 해주고 싶고 작은 성취라도 성장이라도 발견해 “잘했다” 응원해주고 싶다. 속상하고 슬프고 힘든 마음 공감하고 위로하며 그들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향과 속도, 경로일지라도 조금이라도 웃으며 지나갈 수 있게도.


그래서 나는 특수교육과에 가기로 결심했다. 지금도 교육하는 것이 무서워 바들바들 떨지만 “특수”가 좋아 특수교사의 길을 걷고 있다.


아마 이 마음은 교직 경력이 더 쌓인다고 해도 사라지진 않을 것 같다. 항상 마주하는 학생들은 장애도 성격도 자라온 환경도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도 모두 다 다르니까.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저마다 다 다르니까. 언제나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고 교사로서 부족한 부분의 역량은 빠르게 인정하고 채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때론, 아니 그 과정이 항상 버겁지만 그만큼 내 내면의 균열이 깨지고 배움이라는 다리가 놓여 성장이라는 땅이 새롭게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이 균열이 천천히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도 크다. 금방이라도 파사삭 깨질 듯 위태롭기도 하지만 학생들을 보며 샘솟는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마음에 또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고 어려운 것 투성이 교직생활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게 있어 특수교육은 정말 매력적이고 애정이 가득한 영역의 분야임을 변함이 없다. 대학을 지원하고 진로를 선택할 때도 여전히 불안감을 한가득 안은 나였지만 과거 용기를 내준 나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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