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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푸치 Mar 22. 2024

어서 와, 시각장애인은 처음이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끈질기게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특수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시기가 너무 늦어 버렸던 걸까. 당시 가려고 했던 특수학교 고등과정에서는 '이료'라고 하는 시각장애 직업 교과를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다니고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 교육과정과는 달라 중간에 전학을 갈 수 없었고 특수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현재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내년에 다시 고1로 재입학을 해야 했다.


성인이 되고 사회에 나와 보니 남들과는 다르게 걸어온 1년이라는 시간이 별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지만 학생 신분에서의 또래들과의 1년 차이는 크게 느껴졌었다. 또 내 인생에서 학교를 자퇴한다는 것과 고등학교를 4년 다녀야 한다는 사실, 20살이 되어서도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더 이상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추억을 쌓을 수 없다는 사실 등은 적지 않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훗날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로 돌아온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넘치도록  값지고 의미 있는 양분의 시간이 되었다.




이왕 다시 고1로 입학을 해야 한다면 나는 앞으로 함께하지 못하고 돌아갈 수 없는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의 추억과 환경, 친구들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고 새기며 고1의 남은 기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고1의 마지막 순간의 순간까지, 방학 기간 중 나와야 했던 보충수업 기간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다녔다. 내년이면 다니지도 못할 학교지만 친구들과 함께 그리워질  평범할 시절의 한 페이지를 간직했다. 그리고 고1의 마지막날이 되었을 때 나는 자퇴서와 함께 조용히 일반학교에서의 추억을 정리했다.




그리고 대망의 시각장애 특수학교 고등과정의 입학식날이 되었다. 학교에 가는 첫날이기도 하고 초행길이기도 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와 함께 학교에 등교했다. 버스나 지하철은 친구들과 가끔 시내에 놀러 갈 때 다 같이 우르르 다녔던 경험밖에 없어서 단 한 번도 대중교통을 혼자 타본 적 없었다. 그런데 이젠 매일 혼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왕복 2시간의 등하굣길을 다녀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하고 너무나 쉬운 과정일 수 있겠지만 달려오는 버스번호를 볼 수 없는 내게, 지하철 칸 번호도 보이지 않는 내겐 대중교통을 타는 것이 여간 쉽지만은 않았다. 글씨가 보이지 않으니 엄마를 따라다니며 여기서는 왼쪽, 오른쪽, 환승을 할 때는 벽에 놀이동산 그림이 그려진 곳에서 타기 등 나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길을 익혔다. 하교할 때는 혼자 집에 돌아가야 했기에 바짝 신경을 쓰고 학교 언덕 위 교문을 올랐다. 이날의 풍경과 소리는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잊을 수 없이 선명하다. 교문을 들어서자 스피커에서는 동요 '네 잎.  클로버'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랄랄라 한 잎 랄라라 두 잎 랄랄라 세 잎 랄라라 네 잎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수줍은 얼굴의 미소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확신했다. 이곳에서 분명 나는 좋은 일이 가득할 거라고. 그리고 언덕을 다 오르고 난 뒤 정면으로 보이는 학교의 풍경은 굉장히 평화로웠다. 늘 전교생이 많아 한 학년에 16반까지 있던 큰 학교를 다녔던 내게 이곳은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올듯한 아기자기하고 아담한 학교였다. 그리고 노래 사이 중간중간에 "띵동~띵동~"하고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학교 출입문의 위치를 알리는 소리,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면 휠체어를 이용해도 편하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한 슬립계단이 있었다. 교실은 정말 작았고 나와 같은 반으로 배정된 학생도 6명 정도로 매우 적었다. 책꽂이에는 점자책이 가득했고 식당에 가면 이미 정해진 자리에 식판이 준비되어 있었다.


신기하고 낯설고 새롭고 조금 쓸쓸하기도 했다. 너무 수많은 감정과 환경이 내게 찾아오니 좋으면서도 힘들고 편하면서도 외로웠다.  




엄마는 입학식 도중에도 내게 “정말 이 학교에 다녀야겠니?”하고 물으셨다. 정말 내가 지금이라도 다니지 않겠다고 말하면 당장 내 손을 잡고 학교를 뛰쳐나갈 것처럼. 물론 나도 막상 특수학교라는 곳에 와보니 너무나 낯선 환경에 적지 않게 당황했고 무엇보다 내생에 시각장애인을 처음으로 접한 날이기도 했다. 내가 시각장애가 있으니 나와 비슷한 학생들이 있을 거라 생각에 잠시 잊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면 아예 안 보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시각장애인은 어떤 정의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고 각 나라마다 규정짓는 수치도 일치하지 않는다. 고로 다음은 시각장애인을 규정하는 정의의 부분적인 내용 중 일부다.


나와 같이 잔존시력이 남아 있는 경우는 ‘저시력’, 잔존 시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시각이 아닌 청각이나 촉각 등 다른 감각을  주된 감각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맹’이라고 한다. 저시력은 워낙 범주가 다양해 글씨조차 보기 어려운 나 같은 저시력이 있기도 하고 한쪽 눈만 실명하여 나머지 좋은 한쪽 눈으로 운전까지 하고 다닐 수 있는 저시력도 있다. 맹은 빛을 감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감지하면 광각, 빛조차 감지하지 못하면 전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특수학교에 와서 맹 범주에 속하는 시각장애인을 실제로 처음 만났고 점자라는 것도 처음 보게 되었다. 학생들 중에는 오른쪽 눈만 보이는 사람도 있고 왼쪽 눈만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한쪽 눈이 안 보일 수 있구나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나는 미약한 시력이지만 양쪽 눈이 다 보인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한쪽눈이 실명했다면 나름대로 또 살아가긴 하겠지만 두렵고 무서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늘 내게 부족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생각이 어느새 조금씩 내게 남아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과 관점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시각장애 특수학교는 유치원과정부터 초, 중, 고, 성인이 다닐 수 있는 전공과정까지 여러 과정이 함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생부터 50-60대 성인분들까지 저마다의 이유로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학교 선생님 중에는 6.25 전쟁 시절 놀이터에서 흙을 파고 놀다가 지뢰를 잘못 건드려 사고로 실명이 된 분도 계셨고, 누군가는 오토바이 사고로 누군가는 자고 일어났더니 하루아침에, 또 누군가는 망막이 남들보다 약했는데 날아오는 공에 맞아서, 뛰다가, 운동을 하다가 등 외부적인 충격에 의해 망막이 떨어져 실명이 된 사람도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송곳에 눈이 찔려 실명해 지금의 6점 점자를 만든 루이브라유처럼 뾰족한 컴퍼스에 눈이 찔려서, 심지어 닭이 부리로 눈을 쪼아서 실명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어떤 병이 있어서, 유전이 되는 병이 있어서, 미숙아로 태어나서, 뇌성마비로 인해, 뇌종양 때문에, 당뇨 합병증으로, 노안으로 등등.. 다양한 원인과 양상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다양한 원인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만큼 저마다의 시각 특성도 살아온 인생도 굉장히 다양했고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도 다양했다. 나는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그들을 알아갔고 그들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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