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지내는 하루하루가 더해갈수록 내 마음과 정신은 점점 더 병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늘 공부는 못하던 학생이었지만 수업시간에는 늘 졸지 않고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눈으로 책과 칠판을 볼 수 없으니 귀를 더 쫑긋 세우고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수업 내용을 놓칠까 선생님이 판서하면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공책에 옮겨 적기 바빴다. 글씨가 보이지 않아 늘 책상에 코를 박고 엎드려 있어 수업시간에 자는 걸로 오해도 많이 받아 혼나기도 많이 혼나고 태도점수는 최하점수를 받았어도, 억울했어도, 때론 속상했어도, 나는 늘 수업에 열심히 임했다. 늘 지각을 할랑 말랑 등교를 했지만, 학교를 다니며 그나마 노려볼만한 상은 개근상이라고 생각하고 늘 학교를 성실히 다녔다. 꾀병을 부리거나 조금 아프다고 학교를 결석하는 일도 조퇴하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점점 변했다. 수업시간에 자는 것은 기본이요, 학교에 지각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지각하는 시간은 점점 더 늦어져 수업시간도 빼먹게 되었다. 한동안 무단지각이 이어지다가 결국엔 학교에 가지 않는 무단결석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학교에 가는 것이 싫었다. 그곳에서 무능력하고 한심한 내 모습이 너무나도 싫었다. 점점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들었다. 살기가 싫었다. 하늘이 너무 원망스럽고 남들과는 다르게 태어난 내 모습이 내 인생이 너무나도 힘들고 슬펐다. 그래서 나는 해서는 안될 짓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17살 햇빛이 좋았던 봄날의 주말, 나는 내 방에 틀어박혀 2시간을 내내 펑펑 울며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내용과 너무 힘들고 지친다는 내용이 담긴 나름의 유언장을 작성하고 목을 매달았다. 그런데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제대로 죽는 법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시도한 자살은 목에 줄로 목을 맨 상처만 남기고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며, 죽기도 힘들다며, 질긴 목숨에 진저리가 나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나는 또 하루하루를 살아나가야 했다. 그래서 더 절실함이 더해졌는지 모른다. 내가 공부할 수 있고 꿈을 펼칠 수 있는 곳, 나에게 맞는 교육을 하는 곳, 무능력한 내가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곳. 나는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특수학교.
인터넷에서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시각장애 특수학교를 검색해 봤다. 3곳 정도가 나왔다. 2곳은 서울, 1곳은 인천. 경기도에 살고 있는 내가 갈 수 있는 지역의 학교는 없었다. 조금 더 찾아보니 전국에 있는 시각장애 특수학교 자체가 매우 적었다. 그때 당시 전국에 13곳(?) 정도 있었던 듯하다. 늘 걸어서 학교를 다녔던 내게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학교가 낯설게 느껴졌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래도 학교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특수학교는 무상 급식에 무상 교육이라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학교는 준비물도 교복도 학교에서 지원해 준다고 하는데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준비물이며 교복, 급식비 등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꽤 있었다. 특수학교에서 교복을 입는지, 학교 규정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궁금한 게 많았지만 내가 원하는 정보는 찾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준다는 것과 무상교육이라는 정보를 부모님을 설득할 목적으로 취합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용기를 내어 특수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런 곳은 진짜 안 보이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야. 너는 다 보이는데 특수학교를 왜 가니?”
‘아.. 진짜 안 보이는 사람… 다 보인다고..?’
안 보인다는 기준은 뭐고 다 보인다는 기준은 뭘까 다 보이는데 나는 왜 시각장애인인 걸까 단순히 안 보인다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사람인 걸까?
엄마는 말씀하셨다. 너는 공부도 하고 일상생활도 다 되는데 왜 가냐고
엄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 걸까? 아니면 특수학교라는 부정적인 편견과 인식 때문에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이었을까?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특수교사로 일을 하면서 우리 엄마와 비슷한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해한다. 장애를 수용하기에 앞서 먼저 부정과 연민, 또 깊은 슬픔과 우울,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 심지어 혐오까지 다양한 감정이 교차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 양상이 과잉보호라는 형태로도 무기력이라는 형태로도 방임의 형태로도 예민함이라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수용할 시간과 마음이 필요함을. 결코 하루아침에 뚝딱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장애를 바라보는 마음과 태도가 조금의 방향성이 어긋나더라도 속도가 느리더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헤아리고 기다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지 못할 때,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옆에 손내밀면 닿을 곳에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를 좋아한다. 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사람을 만날 때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함께 지내온 시간과 횟수, 수많이 오고 간 대화로도 그 사람에 대해 안다는 것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 속의 알맹이를 찾을 수 있도록 안을 더 들여다보고 서로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엄마는 알았을까?
이곳, 저곳, 여기, 저기 등과 같이 흔히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지시대명사가 나에게는 엄청나게 어려운 말이었다는 걸
언제나 소외되고 뒤쳐지고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았고 도움만 받고 짐만 되었던 내 학교생활을
속내를 비친 적은 없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나빠 속상하고 서럽고 힘들었던 순간과 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또 어릴 때부터 비정상적인 뼈 성장으로 인해 남들과는 다른 손과 팔 때문에 무더운 여름철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늘 얇은 긴팔 카디건을 걸치고 다녔어야 했던 내 모습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알았더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외면했을 것이다. 특수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니 아빠는 내게 그곳은 시각장애 1, 2급만 받아준다는 말도 하셨다. 지금에야 장애를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인(중증),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경증)으로 나누지만 내가 고등학생 때는 시각장애를 1~6급까지 급수로 나누었다. 그러니 아빠는 내가 시각장애 3급이기에 시각장애 특수학교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너무나도 화가 났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몹쓸 기준이라 생각했고 당장 뜯어고칠 기세로 학교에 직접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황당함을 한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친절하게 시각장애 1~6급까지 시각장애 등급이 있으면 모두 다 받아준다는 답변이었다. 부모님은 아마 적당히 둘러대면 특수학교에 가고 싶다는 내 생각과 마음이 적당히 변하거나 사라질 줄 아셨나 보다. 그렇지만 나는 완강했다. 아니, 어쩌면 정말 삶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실했다. 그렇게 부모님과의 반대로, 또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와 당시 특수학교에서 배우는 교육과정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는 1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