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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푸치 Mar 08. 2024

시각장애인이라는 이름표만 하나 더 생겼을 뿐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을 준비: 나에게 맞는 교육이 필요해

내가 법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고등학교 입학을 갓 앞둔 17살이 되던 해 2월이었다. 평소 내가 눈이 나쁜 것을 알고 지내던 엄마 지인이 나 정도의 시력이면 시각장애 판정이 나올 것 같다는 말에 안과에 가서 시각장애 판정 여부를 의뢰했다.


결과는 왼쪽 눈 교정시력 0.06, 오른쪽 눈 교정시력 0.04였다. 그때 당시 좋은 눈의 시력이 0.08 이하인 자를 시각장애 3급으로 규정했기에 나는 시각장애 3급 판정을 덜컹 받아 버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이질적이고 낯설게 느껴지던 시각장애인이라는 이름표가 내게 오니 답답했던 마음이 정말 편안해지고 좋았다. 지금까지 남들과는 다르게 눈이 나빠 잘 보지 못했던 내 삶에 속 시원한 해답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시각장애가 있어서 잘 안 보였던 거였구나~ 뭐야 장애 별거 아니잖아? 내가 장애인이었잖아?’


다소 건방지기도 당돌하기도 했던 나는 그렇게 나의 삶에 장애라는 것을 양팔 벌려 받아들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그냥 나로 살아왔을 뿐인데 시각장애인이라는 이름표만 하나 더 생겼을 뿐이라고. 때론 시각장애인이라는 이름표가 부정적인 낙인 효과로 작용해 내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며 살게 되겠지만, 또 같은 입장에 놓인 누군가에게는 당사자의 가족들에게는 마음 아픈 단어가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 인생에 내게 찾아온 장애는 그동안 하늘을 원망하며 내가 겪어야 했던 수많은 힘들었던 날들에 대한 실마리이자 내 삶의 작은 퍼즐조각을 찾은 느낌이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야?’라는 생각이 안 든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공식적으로 장애판정을 받고 나니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기 자신에게마저 이해받지 못했던 나에게 조금이나마 다정하게 토닥여 줄 힘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비교적 나는 내게 “짠!!”하고 나타난 장애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그런데 인문계 고등학교에서의 하루하루는 매일이 불안했고 답답했으며 우울하고 절망적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같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중 제일 친한 친구와도 같은 반이 되어 학교 생활은 재밌었다. 그런데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밥만 축내는 식충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밤 9~10시 정도까지 강제로 해야 했던 야간자율학습시간이었다.


글씨를 보기 어려웠던 나는 평소 수업 때는 주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수업을 따라갔다. 그런데 야간자율학습시간은 선생님이 앞에 나와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었고 정말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글씨가 보이지 않으니 그 시간이 너무 아깝고 무의미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엄청난 열등감을 느꼈다. 실제로 고등학교에 와서 나는 친구들과 학습적으로 엄청나게 격차가 벌어졌다.


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대학교를 가기 위해 조성된 면학 분위기는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기 충분했고 처음으로 본 중간고사에서는 반 꼴찌라는 역사적인 결과를 얻었다. 눈이 나빠 중학교 때도 공부를 못했지만 그때는 반에 훈련 때문에 수업을 자주 빼먹는 축구부 학생들이 있어 꼴찌는 면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와서는 축구부도 없었고 대학을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만 가득했다.




내가 공부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다면 내가 공부에 대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 크게 속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고 나만의 방식으로 공부도 했다. 엄마는 나를 위해 굵은 펜으로 수업 자료를 옮겨 적어 주시기도 하셨고 새벽 내내 목이 터져라 내 시력으로는 볼 수 없는 교과서와 수업 자료를 읽어주시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엄마가 읽어주는 내용을 모조리 타이핑으로 옮겨 적어 컴퓨터 화면에 큰 글씨로 바꾸어 봤다. 이렇게 나는 내 방식대로 공부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노력했다.


그런데 정작 시험지는 글씨가 보이지 않아 문제를 풀 수 없었고 나를 위한 추가시간도 없었다. 답안을 마킹할 때는 조용히 손을 들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마킹하는 것 좀 도와주세요.”라고 적힌 꼬깃꼬깃한 종이를 선생님들께 내밀어야 했다. 시험 때면 나는 더 특별하고 선생님들께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장애 등급이 있었기에 장애로 인해 겪게 될 수 있는 어려운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특수교육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사자인 나는 물론이고 일반 학교에 계셨던 선생님들마저 이런 특수교육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던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고등학교 후반부에 가서는 확대 시험지를 제공받아 시험을 보기도 했지만 확대 시험지는 종이 크기만 컸지 정작 그 안에 있는 글씨는 별로 크지 않았다. 같은 안질환을 가진 시각장애인이라도 각 개인의 고유한 시각 특성은 정말 천차만별이다. 나는 시각 특성상 일반 시험지에서 조금 더 큰 확대 시험지라고 해서 글씨를 읽을 수 있는 시력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종이가 커서 들고 읽기도 불편했다. 어떤 시각장애인에게는 그 지원이 부족한 시기능을 보완할 수 있는 적절한 지원일 수 있다. 하지만 잘 안 보인다고 무조건 글씨가 커야 잘 보이는 것은 아니다. 시력의 정도와 시야 손상 여부에 따라 저마다 지원되어야 하는 게 다르고 때론 점자나 음성 매체 등 다른 감각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도 보조공학기기를 활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훗날 특수교육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시각장애인을 위한 확대법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고 한다.


- 상대적 거리 확대법: 물체와 눈의 거리를 가까이하여 보는 것. 그렇지만 나는 거리가 멀면 시력 때문에 볼 수 없고 가까우면 초점을 못 잡는 것처럼 눈앞이 뿌옇게 보인다. 고로 이도 저도 안됨. 그런데 상당수의 저시력 시각장애인이 이 방법을 통해 잘 보는 경우가 많다.


- 상대적 크기 확대법: 물체의 실제크기를 확대한 것. 확대 교과서, 확대 시험지 등. 이게 바로 내가 지원받은 형태의 확대법이다. 그렇지만 프롤로그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나는 최소 36pt정도의 크기여야 맨눈으로 글씨를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애초에 일반 교과서의 글씨 크기가 11pt 정도 라고 했을 때 내가 보기 위해선 3~4배 큰 교과서, 시험지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생각만 해도 그 압도적인 크기와 무게에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 각도 확대법: 여러 종류의 렌즈를 사용하여 물체의 크기를 확대하는 법. 망원경, 확대경 등. 망원경은 칠판이나 게시판 등 멀리 있는 것을 볼 때, 확대경은 독서와 같은 근거리 작업을 할 때 사용할 수 있다. 흔히 알고 있는 돋보기와 유사하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돋보기는 확대 배율이 2~4배 정도로 낮은 편이고 확대경은 10 배율이 넘는 것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망원경과 확대경은 사용하기 전에 전문가로부터 보조공학평가를 받은 후 자신의 시기능 상태에 맞는 적합한 배율을 배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또 주변부 시야가 손상된 터널시야의 특징을 가지는 녹내장, 망막색소변성증 등과 같은 안질환이 있는 경우 현재 남아있는 시야 상태와 배율을 고려해봐야 한다. 여러모로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확대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때 당시 나는 그 어떤 보조공학도 알지 못했고 지원받지도 못했었다.


- 투사 확대법: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등의 화면을 통해 보는 확대법이다. 대표적으로 독서확대기라는 것이 있고 확대법 중 내게 가장 적합한 방법의 확대법이며 프롤로그에 첨부한 사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때 난 독서확대기라는 것을 몰랐다. 아마 이 보조공학을 빨리 알았더라면 나는 계속 일반학교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시험 시간 내에 가장 문제를 풀지 못했던 것은 국어 영역이었다. 지문이 길어 시험시간 내내 단 4문제 만을 풀 수 있었고 그 결과 국어 9등급이라는 엄청난 오점을 성적표에 남기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늘 학습이 부진해 나머지 공부를 했던 나는 대학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은 한 번도 꿔본 적이 없었다. 내 성적과 신체로는 대학은커녕 장래희망을 정하는 것도 현실적인 벽 앞에 늘 튕겨져 나갔고 그 흔한 선생님이라는 장래희망도 내게는 머나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점점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내 진로와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무능력한 스스로가 못 견디게 싫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절실히.  


그래서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던 특수학교라는 곳에 가기로 결심했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는 내게 맞는 교육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는 시각장애가 있으니 내게 맞는 시각장애 교육을 하는 특수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장애인이라면 분명 나와 비슷한 학생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특수학교에 가서 기술이라도 배울 마음이었다. 그런데 특수학교에 대한 부모님의 부정적인 의견은 강했고 나는 반대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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